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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漢) 등 각 지역의 명망 있는 인물 137인의 죽음을 각오하고 여기에 서명하였다. 이 장서를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노끈으로 꼬아 짚신을 만들어 1919년 3월 28일 상해 임시정부로 가지고 갔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를 다시 영어, 불어, 독어로 번역하여,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 편으로 파리 강화회의에 전달토록 하는 한편, 외국의 공관과 언론기관을 비롯해 국내의 각 향교 등 주요기관에 우송하였다. 파리장서는 일제의 부당한 주권강탈이 결코 한국이 원하는 것이 아니며 만국공의(萬國公議)에도 위배되는 일이고, 우리는 나라 없이 살기보다는 차라리 나라를 지키다 죽는 것을 바라며, 결코 일본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 이라는 결의를 밝히고, 우리의 독립을 도와달라는 내용이다. 파리장서운동은 국내외의 각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한민족의 민족독립에 대한 염원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이 드러난 후 일제는 서명자를 비롯하여 유림인사 수백 명을 체포하였으며, 서명자들은 고문을 당하고 수개월에서 수년 간 옥살이를 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명 중 합천군이 11명이다. 합천군의 서명자 중에서 7명이 대병면 사람이니, 정와(貞窩) 송호기(宋鎬基), 계산(桂山) 송재락(宋在洛), 의재(毅齋) 송호완(宋鎬完), 상헌(尙軒) 송철수(宋哲秀), (족보명 송기용(宋箕用)) 항재(恒齋) 송호곤(宋鎬坤)과, 겸산(謙山) 문용(文鏞), 죽포(竹圃) 박익희(朴翼熙)가 바로 그들이다. 이중에서 송호기, 송재락, 송호완, 송철수, 송호곤은 모두 은진송씨(恩津宋氏) 충순위공파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려서는 난곡(蘭谷) 송희일(宋熙馹)과 상강(常岡) 송민용(宋民用)에게서 배우고, 장성해서는 곽종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유가(儒家)의 덕목을 함양하고 실천했다. 파리장서운동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니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과 2006년에 모두 독립유공자로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같은 문중에서 5명 이상이 파리장서에 서명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곳 후손들은 망루계(望樓契)를 조직하여 선대의 아름다운 충절(忠節)을 잊지않고 오랜 세월동안 숭모(崇慕)의 정신을 기려오고 있다. 이들의 의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