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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와 인민군의 8월.9월 공세 - 북한군의 위협적인 공세 / 부관들과 작전회의 중인 워커장군 기습적인 불법남침을 시작한 공산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7월 말에 이르러 낙동강을 도하하여 대구와 부산을 잇는 아군의 대동맥을 끊으려고 압박을 가하여 왔다. 이에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지대를 잇는 천연 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사수하기로 하였다. 이 낙동강 방어선을 워커라인(WALKER-LINE)이라고도 부른다. 8월 4일 새벽 1시를 기해 형성된 낙동강 방어선은 남북 160Km, 동서 80Km의 타원형을 이루었는데, 낙동강 일대의 방어는 주로 미군이, 동북부 산악지대의 방어는 국군이 담당하였다. 한편, 북한군은 수안보에 전선사령부를 두고, 미군 정면에 제1군다, 국군 정면에 제2군단을 배치하여 이른바 '8월공세(1950.8.4~8.25)'와 '9월공세(1950.9.1~9.15)'의 두번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왔다. 그리하여 대구방어전투.영천전투.동해안지구전투 등 많은 공방전이 전개되어 곳에 따라서는 방어선을 돌파당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군은 내선작전의 이점과 제공.제해권의 우위를 최대한 활용하여 격퇴하였으며,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 개시와 더불어 다음날부터 총반격을 시작하였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여 남한 점령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초조한 의도에서 전병력을 집중하였던 북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켜 아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효과를 거둠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전투 중 곳곳에서 전개된 국군과 미군의 협조적 전투수행은 한미연합작전 능력 향상의 초석이 되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의 실패를 계기로 북한은 권력층 내부에 알력관계로 조성되기 시작함으로써, 북한군의 작전수행에 직.간접적으로 상당한 차질을 초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