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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잊혀진 혁명가 이관술을 해방 직후 조선인들은 어떻게 평가했을까? 해방직후 선구회라는 보수적인 잡지사에서 정치인 여론조사를 했다.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결과는 놀라웠다. 요즘 사람들이 해방 직후 인물 하면 대부분 김구, 이승만, 김규식, 조병옥을 떠올릴 텐데, 당시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1위는 여운형으로 33%를 차지했다.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자였다가 이후에 사회민주주의자가 된 그였다. 다음은 이승만(20%), 김구(17%)가 뒤를 이었다. 놀라운 것은 다음부터다. 박헌영(15%), 이관술(13%)이 4, 5위를 차지한 것이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당수이고, 이관술은 조선공산당 총무이자 재정부장을 맡고 있었다. 한동안 '공산당'하면 '빨갱이'를 떠올렸고 '악마'같은 존재로 인식했지만, 해방 직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말인 1930~40년대에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은 일제에 전향하거나 순응해 별다른 독립운동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이러한 사실을 국민들이 잘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것이 여론조사에 반영된 것이다. 이관술은 당시에 조선공산당이라는 거대정당의 주요직책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박하고 성실한 삶을 살았다고 알려졌다. 소속은 공산당이었지만 좌·우익 진영에서 고루 호감을 받았다. 1946년 5월 4~7일 중부경찰서 형사대가 서울 소공동 74번지에 위치한 조선정판사 건물에 들이닥쳤다. 정판사 사장 박낙종과 서무과장 송언필, 재무과장 박정상, 기술과장 김창선 등을 검거했다. 검거령이 내려진 이관술도 7월 6일 체포되었다. '정판사 위폐사건'이란, 조선공산당 간부 및 조선정판사 직원들이 공모하여 조선정판사 인쇄시설을 이용해 1945년 10월 하순부터 1946년 2월까지 총 6회에 걸쳐 1200만 원의 위조지폐를 찍었다는 것이다.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한국어과 박사학위 논문) 초고속으로 진행된 재판은 경찰조사과정에서 피의자에 대한 고문, 충분한 변론기회 박탈, 증거 불충분 등의 숱한 조작혐의가 있었다. 소설가 안재성은 조선정판사 사건이 조작혐의가 짙다고 했으며, 임성욱 박사는 그의 논문에서 정판사사건이 조작된 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해방 후 좌익진영을 분쇄한 사건은 '모스크바 삼삼회의 결정에 따른 논쟁'과 '정판사 사건'이었다. 정치적 의도가 다분했던 이 사건과 재판으로 이관술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송언필과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그는 만 4년간의 수감생활 끝에 대전 산내에서 '위조 지폐범'이라는 오명(汚名)을 쓴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출처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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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군 언양읍 반곡리 709 반곡초등학교 설립 시 이관술 선생이 땅을 기증한 공로비가 있다고 해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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