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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희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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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후반부터 해방 직후까지 명성이 높았던 독립 운동가로는 학암 이관술 선생이 있습니다. 일본으로 유학해 1929년 3월 동경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4월 동덕여자고등 보통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1931년 학생자치 및 교내 경찰 출입 반대 등을 내건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엄호했습니다. 1932년 10월 재학생과 졸업생으로 구성된 독서회를 지도했으며, 11월 ‘반제동맹 경성지방결성 준비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1933년 1월 ‘경성 반제동맹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1934년 3월 31일 병보석으로 가출옥, 12개월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리고 <경성트로이카>와 적색노조 사건으로 1941년 검거당해 수감되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 및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으로 활동했습니다. 1946년 2월 민족 통일전선 조직인 민주주의 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습니다. 그해 7월 6일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으로 미군정 경찰에 검거되어, 11월 28일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수감 중이던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 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대전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위법하게 처형당했습니다. 출처 : 울산광역시 홍보 블로그 울산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