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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보습학교를 각각 졸업하고 20세에 면서기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20여년간 면행정에 종사하면서 전후 세차례 면장을 역임했다. 공은 민간에서 "허면장 보리밭 매나마나"라고 말할 정도로 집일은 제쳐놓고 공무에 열중하여 근검절약하고 청렴결백한 면장으로 일관했다. 문화재보호에도 관심이 깊어 일인이 본면염암사지 쌍사자석 등을 도절하여 몰래 선영군 대의면까지 반출해간 것을 허맹도 정태호 윤범석 등과 함께 면민을 동원 추격하여 원위치에 환원시켰다. 특히 6.25 동란 중 지나가던 외지 무장경찰이 이른바 보도연맹원관계자 100여명을 과도히 염려한 나머지 합숙훈련이란 명목으로 가회국민학교에 소집하여 무차별 도륙하려던 찬라에 송진규의 제보로 공이 본 면지서 주임 조정수와 함께 달려가 그 무고함을 울며 호소하여 살육직전에 풀여나게 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본면 본군은 물론이고 인근 제군에까지 송성이 자자했다. 41세 무렵에는 본인의 중부 송근영과 허언 및 정홍두 등과 더부러 가회중학교의 창설에 나서 재단허가와 기성회모금을 위해 7년을 하루같이 동분서주했고 두번 교장을 역임했다. 교장 재임시 교사들이 수업에 전념토록 하기 위해 손수 장부 정리와 공문기안까지 했으며 손님과의 대화 중에도 종이에 줄을 치거나 장부표지 또는 노끈을 만들었다. 교장이면서 교사들 보다 월급이 적었고 그런데도 사비로 고향가는 교사의 여비를 도왔다. 만년 교장으로 헌신중 1958(무술)년 7월 22일 갑자기 돌아가니 향년 47세였다. 몇일뒤 면민장으로 소곡갑좌원에 안장했다. ... 후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