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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언덕 - 광주 3.1운동 발상지 광주에서의 3.1운동은 광주 출신으로 동경 메이지대학에 유학중이던 정광호가 최팔용 등 11인이 서명한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발표된 2.8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서울에서 유학중이던 광주출신 김범수 등과 만나 광주에서 내려오면서 부터였다. 2월 말 서울에서 광주의 3.1운동을 논의하기 위해 김필수 목사가 내려와 최흥종과 김복현(김철)을 만났고, 이후 두 사람은 3월 2일 상경하여 유학생들을 만나 광주 3.1운동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후 책임자가 되었지만, 3월 5일 최흥종은 유인물을 나눠주고 깃발을 흔들며 만세시위를 선동하다 체포된다. 최흥종의 체포를 확인한 김복현은 3월 6일 손병희 외 32인이 서명한 3.1독립선언서 등 5종류의 문건을 지참하고 광주로 내려온 후 당일 저녁 남궁혁의 집에서 광주 3.1만세시위를 모의한다. 이때 참석한 인물은 김복현.김강.최병준.송흥진.최정두.한길상.김용구.김태열.강석봉.손익식 등 양림동 기독교계인사와 신문잡지종람소 회원, 숭일학교 교사 등 10명이었다. 3월 8일 큰 장날을 기해 만세를 부르려던 계획은 독립선언서 등 준비 소홀로 3월 10일 작은 장날로 연기된다. 10일 오후 3시 30분, 광주교 밑 모래사장에 수백 명의 군중이 모여들자, 김복현은 시위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운동의 개시를 선언한다. 이어 시위 군중들은 모래밭에서 언덕으로 올라와 작은 시장으로 출발, 양림리 방면에서 달려 온 숭일학교 학생 100여명과 수피아학교 여학생 30여 명, 작은 시장에 모인 시민 수 백명과 합쳐져 독립만세 기와 구한국 국기를 휘날렸고, 기를 손에 들지 않은 모자를 흔들고 혹은 양손을 들고 수시로 독립만세를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 때 수피아여학교 윤형숙은 일본 헌병이 내리친 칼에 왼팔이 잘리는 등 경찰서 앞마당은 피로 벌겋게 물들게 된다. 시위에 참가하였던 제중원 회계직원이던 황성호는 독립의식을 높이고 다음 거사를 위해 윤익선 명의로 발행되었던 「조선독립신문」을 모방하여 「조선독립광주신문」 1~3호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광주천 광주교에서 시작된 광주 3.1만세운동의 정신은 해방 이후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를 쟁취하는 광주인들의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다. 〈노성태 「광주의 기억을 걷다」중에서〉 현재 휴먼시아 아파트로 인해 사라진 남궁혁의 집터가 있던 곳으로 광주 3.1운동을 처음 모의한 곳을 기억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2019. 5. 남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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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