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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의 만남 항일운동에 투신한 정율성은 중국 상해에 체류하던 러시아 음악가 '크리노와'(kRENOWA)를 만나게 된다. 남경에서 상해까지의 먼거리를 오가며 정율성은 크리노와에게 성악과 음악이론을 배웠다. 크리노와는 그에게 이탈리아 유학을 제안했지만, 그는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신음하는 민족을 외면할 수 없었다. 1936년 정율성은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입한다. 이듬해인 1937년 7월 중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한 일제에 맞선 정율성은 '대공전복무단(大公戰服務団) 선전대대 음악대장을 맡아 항일가요 들을 작곡하기 시작한다. "일제의 포화 두렵지 않거니"로 시작되는 '유격전가'와 '전투부녀가' 등이 작곡된 곡들이다. 이때 그의 나이는 23살이였다. 동아시아의 예술혼, 정율성 해방이 되자 정율성은 조국에 돌아와 인민군 협주단을 창설하고 단장을 겸했으며, '3.1행진곡'과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을 작곡했다. 조선인민군 행진곡은 훗날 '조선인민군가'가 되었다. (2007년 10월 북한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을 맞이한 인민군 군악대가 연주했다.) 음악가 정율성의 생애는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1959년, 그는 '반당분자'라는 누명을 쓰기도 했고, 1960년대를 휩쓴 문화혁명의 광풍 속에서 간첩 혐의로 수감되어 모진 고초를 겪기도 했다. 모택동이 죽은 후인 1976년, 그는 사면 복권되어 새로운 창작에 몰두하지만 그 해 12월 7일 갑작스러운 뇌일혈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중국의 3대 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그는 생전에 가곡과 합창곡, 가극, 동요, 영화주제곡 등 360여 곡의 노래를 남겼다. 중국 국립묘지 그의 비석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중국 인민은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일제 침략자들을 몰아냈고, 낡은 중국을 뒤엎었으며, 새 중국을 건설했다." 정율성의 음악은 동족사잔을 부추긴 김일성 집단에게 악용된 점도 있지만, 그 음악성은 서양음악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