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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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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불꽃 박차정 의사(1910년 5월 8일 ~ 1944년 5월 27일) 박차정 의사는 경남 동래군 동래면 복천동 417번지(현재 칠산동 319-1)에서 아버지 박용한과 어머니 김맹연의 3남(문희 문호 문하) 2녀(수정 차정)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25년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 3월에 졸업한 선생은 1929년 12월 근우회 활동으로 서대문경찰서에 구속되어 일경의 극심한 취조를 받던 중 건강 악화로 위험한 지경에 이르자 병보석을 신청하여 1930년 2월 15일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의열단원인 오빠 박문호가 보낸 밀사를 통하여 중국으로 망명, 의열단에 가입하고, 1931년 3월 김원봉과 결혼하였다. 하지만 이 결혼은 14년간의 결혼 생활에도 자녀가 없었음을 볼 때 남녀의 일반적인 결합이 아닌 항일독립 투사로서의 동지적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은 1932년 10월, 중국 남경에서 남편 김원봉과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설립과 제1기 여자교관으로 활약하였으며, 1936년 7월 16일 남경조선부인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으로 활약하는 등 여성전사로서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서다 1939년 2월 오른쪽 가슴에 입은 총상 후유증으로 광복을 1년여 앞두고 1944년 5월 27일 사랑하는 남편의 곁을 영원히 떠나게 되었다. 1945년 12월 2일, 김원봉이 귀국할 때 선생의 유해를 모셔와 고향 뒷산인 부북면 제대로 송악마을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는데,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큰 때문일까? 아니면 다하지 못한 독립투쟁에 대한 한(恨) 때문일까? 선생의 묘지에는 아무리 잔디씨를 뿌려도 잔디가 잘 자라지 않고, 햇살이 있어도 풀도 잘 자라지 않는다. 김원봉의 아내로서 여성 독립투사로서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섰던 선생의 공적을 기려 정부는 1995년 8월 15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