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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치운동으로의 노선 전환과 조직 변동 단내 분열이 조금씩 감지되던 상황에서 윤자영을 비롯한 고려공산당원들이 입단 후 얼마 안 가 의열단을 탈퇴하고 상하이에서 '청년동맹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는 의열단의 운동노선을 '공포론'(테러리즘)으로 폄하하며 비난을 퍼부었다. 이로 인한 청년동맹회와의 갈등 속에서 의열단은 감정적 반응을 앞세우다 노선 공방전에서는 사실상의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그로부터 의열단 내에서도 합법적 대중운동과 그 사상적 배경인 사회주의로 경도하는 단원이 늘어갔다. 지속적인 활동이 가능하고 그 만큼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김원봉 등 의열단 간부진도 기왕의 의열투쟁 노선을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결과, 단순 폭력투쟁이 아닌 제도변혁과 독립전쟁으로 나아갈 혁명적 무장투쟁을 위해 민중을 각오.단결시킬 교육과 의식화 방면으로 관심이 돌려지게 되었다. 또 다른 상황은 재정궁핍이 극심해져 갔다는 것이다. 일제 당국조차도 의열단은 "다른 운동단체들과는 달리 인민의 금전을 강취한 사실이 없고 추호도 인민에게 미혹을 끼친 사실이 없다"고 하였으나, 1925년 이후로는 불미스러운 사건의 발생 사례가 보고되었음에서 의열단의 재정난이 심각해졌음을 엿볼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의열단은 광저우로 본부를 옮기고 단원 다수가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에 입학하여 군사.정치 부문의 인재를 양성하는 쪽으로 활동방향을 바꾸어갔다. 그렇게 함으로써 민중 조직화를 기하기 위한 정치운동과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개시할 수 있을 군사운동의 기반을 조성해가려 한 것이다. 그것이 1929년 베이징에서의 '레닌주의정치학교' 설립, 1932년 난징에서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설립(3기 운영에 의해 125명 졸업) 등의 성과를 낳았으며, 1935년 국외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신당인 '민족혁명당'이 창립될 때 참여하면서 의열단은 자진 해체하였다. 그래도 의열단계의 조직 명맥은 당내에서 계속 유지되었고, 마침내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8년 10월에 중국 관내 최초의 한인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가 창설될 때 당당히 그 주역이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