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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의 투탄의거와 의미 거사용 권총과 폭탄을 초기에는 주로 상하이에서 중국인 등에게서 구입해 썼으나, 1923년에는 비밀 폭탄제조소를 설치해놓고 헝가리인 마자르 등 외국인 기술자를 초빙하여 고성능 폭탄을 만들어 썼다. 폭탄은 투척용(수류탄)과 도화선형이 주로 제작, 동원되었다. 폭탄재료 구입비와 활동비 등의 자금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지원에 의해 조달한 사례가 확인되나, 그 이상의 자금원은 불확실하다. 국내 부호를 집으로 찾아가 기부를 요구한 적도 있으나, 징수 실적은 기대에 못 미치고 저조했다. 그러니 갈수록 자금난에 부딪쳐 거사계획을 포기하거나 거사 규모를 줄여야 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1920년 3월 ~ 6월 : 제1차 국내 대의거 추진의 의의 비록 실패했지만 이 거사기획은 의열단 창단 후 최초로 시도된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규모가 크고 대담하였다. 그래서 총독부 당국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면서 큰 충격을 주었다. 또한 독립운동의 전투성을 아주 드높이는 효과를 내면서 유사한 거사 기도를 이끄는 의열투쟁 사례로 우뚝 서게 되었다. 1920년 12월 27일 최수봉 의거와 그 의의 밀양경찰서에 두 발의 폭탄을 던져 타격한 최수봉의 의거는 영남 일대의 항일 민심을 격동시켰고 전투적 독립운동 진영을 다시금 고무시켜 주었다. 박재혁 의거에 뒤이은 성공적인 의거로 의열단과 김원봉은 제1차 국내 대의거 기획의 실패를 딛고 재기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고, 그것은 이듬해 9월의 김익상 의거로도 입증되었다. 1921년 9월 12일 김익상 의거와 그 의의 대낮에 총독부 청사 안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가 폭탄 두 발을 던져 터뜨리고는 깜쪽같이 빠져나간 김익상의 담대한 행동으로 인해 일제 군경 내부는 발칵 뒤집혔다. 경찰이 모든 수사력을 가동시켜 추적에 나섰지만 김익상은 교묘히 비상경계망을 뚫고 베이징의 본부로 무사히 귀환하였으니, 쏟아지는 경탄과 찬사 속에 의열단의 이름을 크게 떨친 쾌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