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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불태워버렸다. 이로인하여 일헌에 체포당해 조치원 헌병대에 인금되어 20여일 동안 온갖 고문끝에 공주형무소에 수감 악랄한체형도 극복하고 교활한 회유도 불응하므로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 재판을 받아 1년형을 선고받았다. 복역중에도 그 정절은 추호도 변하지 아니하고 식기(접시)를 깨어 자결을 기도하였다가 실패되자 오히려 감시만 더욱 심해지고 옥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5개월의 형기연장 통보를 받았다. 그 후에도 또 자결을 기도하여 사경에 이르자 당황한 형리들은 미음을 억지로 마시게하여 명을 유지시켰다. 형기를 마치고 귀가한 선생은 날이 갈수록 배일사장이 공고하여 일체의 남세를 거부할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일인들이 만든 기차와 자동차도 타지않고 고무신도 신지않는 인고와 자학으로 오직 항일운동만이 철두철미하였다. 4249년 병진에 수많은 일헌이 들이닥쳐 선생일가가 보안법을 범했다는 구실로 선생은 전남 고흥군 거금도로 아우인 재규는 완도군 소안도로 아들 화진은 제주로 각각 유배당했다. 4251년 무오 11월 18일 3년 유배생활에서 풀려 환향하였으나 심한 여독으로 4253년 경신 정월 4일에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니 향년 59세였다. 충북 청원군 강내면 당곡리 자좌원에 안장하였다. 간옹이 선생의 항일행적을 찬양하여 의사라 특서하니 그로부터 세인들도 선생을 의사로 일컷게 되었으며 장씨대동보와 연기군지및 충남도지에 선생의 항일투쟁사가 상세히 등재되었고 독립기념관에도 보관되어있다. 재규는 호가 정암이다, 4215년에 출생하여 선생의 영향을 받아 항일행적이 투옥과 자결미수등 그야말로 그 형에 그 아우라고 광복후 세인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선생의 장자 화진도 고숙과 같이 항일투쟁을 벌였다. 손은 락민이오 증손은 운표이고 정암의 자는 달진 손은 낙홍 낙단이다. 선생이 옥중에 계실때 아우 정암이 문후를 갔었는데 선생이 아우를 보고 선현의 말씀에 이로움이 적고 의로움이 많은 자는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편한하다하였으니 지금 내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편안하다 이는 곧 의로움이 많은 바이니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見利思義(견리사의)의 정신이요 오직 구국일념속에 일생을 마친 고결한한 의지이다. 실로 선생은 절의염퇴(節義廉退)를 겸비한 위인으로 우리나라 근세사의 별이었다. 선생형제는 포의한사(布衣寒士)로서 그 행장이 금화4현지의에 비견할만하고 최면암의 절식과 봉연재의 앙약과 민규정의 복검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동문 임장우가 칭예하였다. 이제 조국은 광복되어 어언 40여 성상 선생은 가고 선생의 항일정신만 남아있으니 그 숭고한 애국애정을 후세에 길이 남기어 만인의 귀감으로 삼고자 뜻있는 분들이 힘을 모아 여기에 비를 세우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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