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page

131 해제 군중이 서문 거리에 이르렀을 때 헌병들은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이 날 총을 쏘았다는 것은 어느 기록에도 없으나 증언자들은 모두 발포하였다고 말한다. 사망자가 없고 부상자를 확인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서 공포탄이었을지도 모른다. 총소리가 나자 군중의 대열은 혼란해졌고, 그런 중에 주동 인물들이 체포되니 군중들도 해산하였다. 이 날 12명이 체포되었다고 하는데 134 판결문에 의하면 기소된 사람만도 이보다 훨씬 많으니 그 뒤에 검거선풍은 계속되었고, 그 중에 곽진근·김경순·이곽경 등 6명의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 헌병사령부 서류에 철원의 검거자를 71명이라고 하였는데 그것도 철원군 전체의 통계라고 보면 기소자 숫자일 것이다. 135 3월 11일 갈말면의 만세시위는 서당훈도 신성규(申聖奎)가 발의하고 보성전문학교 학생 김칠용(金七龍)이 뜻을 함께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3월 1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각 동리에 사람을 보내 면사무소 앞으로 모이게 연락한 후 밤 11시경 문혜리(文惠里)에서 면민 800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각 마을에서 집집마다 한 사람씩 참가하도록 연락하여 내대리·도창리·동막리·통성리 주민은 청양리 주재소가 있는 지경터로 모이게 하고, 군탄리·문혜리 등 남부의 주민은 문혜리 면사무소가 있는 어음재로 집결시켰다. 3월 12일 동막리에서는 새벽에 삼베 주머니에 도시락을 싸가지고 청양리 주재소로 왔다. 청양리 주재소 앞, 즉 지경터에서 토성리로 뻗쳐 있는 벌판에 모인 군중은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만세를 불렀다. 136 김경삼·김상보·김순복·김학길·윤호병·임낙호·전사진 등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윤호병·임낙호는 대열의 앞에 서서 열광적으로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3월 17일 인월면 금사리의 이병준(李炳準)은 철원 장날에 다시 만세시위를 일으킬 계획을 하고 이 날 읍내 시장으로 달려가서 시장에 모인 군중 앞에서 만세시위를 선도하며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8일 내문면 독검리(乃文面 篤儉里)에서 천도교신자 박용득(朴龍得)·이주붕(李周鵬) 등이 전날 밤 이민들에게 독립만세 부를 것을 촉구하고, 독검리 구장 윤선삼(尹先三)을 134 金正明, 앞의 책, 1966, 353쪽. 135 조동걸, 『3·1운동의 역사』, 역사공간, 2010, 141쪽. 13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1979, 5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