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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접근하였고, 경찰과 헌병은 경찰서 건물의 앞뒤에 막아서고 기마대를 앞장 세워 군중을 큰 거리 쪽으로 몰아냈다. 여기서 남산현 감리교회에서 집회를 마치고 진출한 행렬이 합류하면서 일본인 거리인 신시가로 나아갔다. 한 갈래는 도청과 재판소 앞 큰 거리를 누비며 평양역 광장까지 나아갔고, 다른 한 갈래는 평양부청 옆과 일본인 중학교 옆 거리를 거쳐 평양감옥 뒷거리와 서성리, 서문 밖 큰 거리를 돌았다. 이렇게 평양거리는 하루 종일 들끓었다. 학교별로 또는 동네별로 개별적으로 시위를 조직하여 오후 7시경에는 낮보다 배가 되는 군중이 평양경찰서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였다. 경찰이 소방대를 동원하여 물을 뿌려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군중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돌이 날아들어 경찰서 유리 창문이 깨지자 이를 빌미로 경찰이 발포를 시작하면서 군중을 체포하였다. 발포에 분격한 군중이 달려들어 난투극이 벌어졌고, 경찰은 소방대원을 시켜 불 끄는 쇠갈고리로 구타하며 무수한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수백 명이 검거되면서 군중은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 날 밤 한 무리의 학생들이 서문 밖에서 악대를 앞세우고 행진하면서 만세를 부르고 다른 학생 무리들은 남문 밖에서 이에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그 날 밤 군부대가 출동하여 경찰과 함께 만세군중을 탄압하였다. 3월 1일 남산현 감리교회에서도 장대현 장로교회 집회와 같은 시간, 같은 방식으로 독립선언식을 진행하였다. 독립운동에 관한 연설과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행진에 나선 군중은 남대문경찰서 앞에서 장대현 장로교회 시위대와 합세하여 일본인 신시가로 진출하였다. 군중은 일본인 거주지역을 지나면서도 인명이나 가옥 등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았다. 감리교측 집회에 광성학교와 숭의학교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설암리 천도교구당 집회는 서울 천도교중앙총부로부터 직접 연락을 받아 준비되었다. 2월 하순에 평양에서 대교구장이 모여 계획하고 2월 28일 오후 천도교 선천교구장 김상열(金相悅)로부터 평양역에서 중앙총부가 밀송한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다. 평양대교구는 미리 준비하였던 등사판으로 수천 장을 인쇄하여 그 중 약 7,500장을 개신교측에 보내고 남은 것을 시내에 살포하기 위해 산하 각 교구에 발송하였다. 3월 1일 천도교 집회는 고종황제 봉도식을 구실로 모여 진행되었다. 집회 후 가두시위에 나서면서 장대현교회측 시위군중과 합류하였다. 3월 1일 이후 상가 철시도 계속되었고 학교들은 일제히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