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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독립만세를 부르니 장꾼들이 적극 호응하였다. 그러나 일제헌병대의 출동으로 시위대열은 해산하였고 주동자들은 구속되었다. 한편 신천읍은 황해선(黃海線)의 중심역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는데 개신교신자들의 주도로 장날인 3월 27일에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정오경 무정리(武井里) 훈련원 장터에서 20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다. 이에 장터에 모인 장꾼들은 물론 군수인 장유(張裕)도 감격하여 만세를 불렀다. 큰 거리로 뛰쳐나온 시위대열은 점차 증가하였고, 헌병과 충돌이 시작되면서 상점들은 철시하였다. 헌병들이 발포를 시작하자 시위대열 중에 총에 맞아 쓰러지는 사람들이 생겼고 시위대열은 무너졌으며 10여 명 주동자도 검거되었다. 시위는 밤에도 계속되었고, 이튿날에도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졌다. 이틀간의 만세시위로 75명이 체포되었다. 4월 6일 장날에 다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읍내 상인들이 4월 3일부터 태극기를 만들며 준비한 시위였다. 약 30명이 장터에서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만세를 부르다가 일제헌병들에게 체포되었다. 4월 7일에는 읍내를 비롯하여 용문면 사창리, 용진면 유천리, 북부면 석당리 등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신천읍에서는 약 400명이 태극기를 들고 큰 거리를 행진했으며 유천리에서는 300여 명, 사창리에서는 약 200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사창리에서는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만세를 부르던 군중과 헌병 간에 충돌이 일어나 흥분한 군중이 주재소 유리창을 부수기도 하였다. 4월 8일에는 가련면 조우리(加蓮面 棗隅里) 헌병주재소 앞에 약 400명이 모여 시위를 하였고, 두라면 원동리(斗羅面 院洞里)와 가산면 간성리(加山面 干城里)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신천군에서 활동하였던 구순화는 1919년 3월 12일 신천읍 경신학교(儆信學校)에서 학생과 주민 다수와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하다 체포되어 1919년 7월 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1919년 9월 11일 고등법원형사부에서 기각당하였고 미결기간을 합산하여 1년의 옥고를 치렀다. 117 왕경애는 1919년 3월 27일 신천군 읍내에서 김영호(金永昊)·이용규(李容圭)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어 1919년 7월 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1919년 9월 11일 고등법원형사부에서 기각당하였다. 118 117 「판결문」(고등법원형사부, 1919.9.11) ; 「身分帳指紋照會回報書」 ; 31여성동지회, 『한국여성독립운동사 : 31운동 60주년 기념』, 1980, 490∼492쪽. 118 「판결문」(고등법원형사부, 1919.9.1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2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