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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해제 ⑤ 다른 지역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이지만, 장날을 이용하여 대규모의 만세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김포군에서 활동하였던 이살눔은 1919년 3월 초 김포군 월곶면 고양리에서 백일환·성태영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3월 22일 군하리 장날에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배부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7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1919년 8월 1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당하였다. 110 (4) 파주군(坡州郡) 파주의 3·1운동은 111 3월 10일 교하공립보통학교에서 처음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이후 3월 26일부터 30일까지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3월 10일 와석면(瓦石面)의 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구세군신자 임명애(林明愛)가 주도하는 가운데 100여 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였다. 3월 25일 임명애·염규호(廉圭浩) 부부는 학생 김수덕(金守德), 농민 김선명(金善明)·김창실(金昌實) 등과 자신의 집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염규호는 “오는 28일 이민 일동은 윤환산으로 집합하라. 이에 불응하면 방화할 것이다”는 내용의 문서 60매를 인쇄하여 그 일부를 와석면의 당하리(堂下里)·와동리((瓦東里) 등에 배포하였다. 그러나 시위는 하루 앞당긴 3월 27일에 일어났다. 3월 26일 임진면 문산리에서 500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여 이기남이 피격되어 사망하였다. 이 날 주내면에서는 파주리 장날이었는데, 파주리와 인근 주민 500여 명이 곤봉으로 무장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일제헌병이 주도자를 체포하려 하자 시위대원들이 달려들어 일제헌병에게 타격을 가하고 보호하여 체포를 저지시켰다. 일제헌병은 개성헌병대에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이 날 밤에는 청석면(靑石面)의 높은 봉우리에 일제히 봉화가 오르며 독립만세 소리가 높았다. 110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7.12) ;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8.13) ; 이용락, 『三·一運動實錄』, 동지회, 1969, 437·438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154·155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2, 327~331쪽.   11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196~198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1972, 555~558쪽 ; 姜德相, 『現代史 資料』 25(朝鮮 1 : 三·一運動(1), 東京: みすず書房, 1977, 152~154·332~335쪽 ; 이병헌, 『3·1운동비사』, 1959, 883쪽 ; 김정 인·이정은, 앞의 책, 2009, 64~67쪽 ; 파주군사편찬위원회, 『파주군사』, 파주군, 2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