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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해제 여학생들과 일반 군중도 이에 화동(和同)하여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여학생들을 해산시켰다. 92 3월 4일 송도고등보통학교와 호수돈여학교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전개되었는데, 약 600명의 군중이 합세하였다. 밤에는 2,000여 명으로 증가하여 시가행진과 투석전을 전개하며 일제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도 하였다. 이후 송도면에서는 더 이상 시위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 송도면 동본정에 거주하는 김세중·김형렬·이형기·최두순 등은 상인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하고자 “개성 상민(商民)은 본서 도착과 동시에 폐점하라”는 권고문 6통을 작성하여 개성의 대상(大商)들 상점에 투입하였다. 이에 개성의 상점들은 3월 27일부터 폐점하고 철시에 들어갔다. 일본인 상점들이 문을 열어도 개성 사람들은 일본인 상점을 이용하지 않아 일본인 상점들도 할 수 없이 문을 닫았다. 93 개성상인들이 철시하자 개성 외곽지역의 면·리 민들이 새롭게 시위운동을 벌였다. 3월 26일 진봉면 지금리(進鳳面 芝金里)에서 이재록(李在祿)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재록은 『대한제국동포신문』·『대한신문』·『대한제국독립창가집』 등을 만들어 마을사람들에게 회람시켰다. 94 이 날 중면 창내리 앞산에서도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하였다. 3월 28일 진봉면 대조족리에서 마을 사람들이 오관산에 올라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29일과 30일에도 산상 횃불시위를 하였고, 산에서 내려와 면사무소 앞으로 나아가 면장에게 독립만세 고창을 요구하고 일장기를 불태웠다. 이들은 31일 밤에도 횃불시위를 벌였는데 백전리·탄동리 주민들도 참여하였다. 이 날 광덕면의 고천리·사분리·중연리·황강리에서도 수백 명이 만세시위를 하였다. 3월 29일에는 상도면 상도리의 300여 명 군중이 풍독리의 헌병분견소로 나아가 건물을 에워싸고 시위를 벌이며 전선을 끊고 전신주를 넘어뜨리고자 하다가 일제의 총격을 받았다. 3월 31일부터 4월 2일까지 중면 대룽리 뒷산에서는 태극기를 꽂아놓고 밤마다 봉화를 올리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4월 1일 중서면 곡령리(中西面 鵠嶺里)의 청년 수십 명이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시위를 92 호수돈여자중고등학교, 앞의 책, 1999, 96~97쪽. 9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9, 190~191쪽. 9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194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 회, 1972, 5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