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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해제 시위하다 체포되어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언도받았다. 89 (2) 개성(開城) 개성에서의 3·1만세운동은 90 3월 3일 시작되어 중간에 잠시 침체되기도 하였으나 3월 하순에 다시 활발하게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4월 초까지 시가행진에서 산상 횃불시위, 일제관헌을 압박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개성의 3·1운동은 여성 주도의 활약이 주목할 만하다. 개성은 서울의 3·1운동계획과 조직적으로 직접 연계는 약하였지만 경기도에서는 3월 1일 이전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유일한 곳이다. 오화영(吳華英)이 남감리교 전도사 김지환(金智煥)을 통해 북부예배당 목사 강조원(姜助遠)에게 「독립선언서」 200장을 개성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강조원은 개성의 감리교에서 운영하던 호수돈여학교(好壽敦女學校)의 서기 신공량(申公良)을 통해 개성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도록 하였고, 호수돈여학교의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송도면(松都面)의 호수돈여학교 부속 남부소학교[유치원] 교사였던 권애라(權愛羅)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충교(忠橋)예배당 전도부인 신관빈(申寬彬)·어윤희(魚允嬉) 등이 3월 1일 송도면의 만월정(滿月町)·동본정(東本町)·북본정(北本町)에 「독립선언서」 2,000장을 배포하였다. 이를 본 기숙사 사감 신권형(申權形)과 심명철(沈明哲)이 나서서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준비하였다. 호수돈여학교의 권애라·장정심(張貞心)·조숙경(趙淑景) 등은 조국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맹약하였다. 당시 조숙경은 신제(新制) 여고보 제3학년에 입학하였는데 89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12.18) ; 『매일신보』1919.12.20, 「강화소요범, 십팔일에 판결언도」 ; 姜德相, 『 現代史資料』 25(朝鮮 1 : 三·一運動), 東京 : みすず書房, 196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2, 335∼343쪽. 90 金正明, 『朝鮮獨立運動』Ⅰ, 東京 : 原書房, 1966, 328 ; 姜德相, 『現代史資料』 25(朝鮮 1 : 三·一運動), 東京 : みすず書房, 1967, 9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9, 189-194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2, 193~123쪽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5(삼일 운동 5), 1991, 60~61쪽 ; 『국내 3·1운동 Ⅰ- 중부북부』, 18~22쪽 ; 안경호 편, 『어윤희 추모록』, 1996, 142쪽 ; 강영심, 「어윤희 (1880~1961)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문화연구』 17, 2009, 2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