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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伯)·황도문(黃道文)·황유부(黃有富) 등에 의해 계획되었다. 이들은 강화읍 장날인 3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하였다. 3월 11일 황유부의 집에서 염성오·황도문 등이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國民會報) 등의 문건을 수백 매씩 인쇄하고, 황도문은 18일의 거사를 주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강화인민에게」라는 전단과 「독립가」를 만들었다. 3월 18일 강화 장터에 모인 만세시위군중은 활동하기 편하게 발에 감발을 하였다. 군중 사이에는 만세시위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오후 2시가 되자 유희철(劉熙哲)·황윤실·황일남 등이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강화 장터는 관청리와 신문리에 걸쳐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에 냇물이 흐르고 돌다리[石橋]가 있어 시위 주도자들은 돌다리 근처에서 시위를 주도하여 양쪽 장터 군중을 모았다. 유희철이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이어 장명순·조상문·황윤실 등이 독립만세를 연창하였다. 이들은 ‘조선독립’이라 쓴 큰 깃발을 든 유희철을 선두로 신문리 시장을 한 바퀴 돌고 관청리 쪽으로 행진하였다. 시장 남쪽에서는 조기신(趙基信)이 손수 만든 태극기 십수매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종이로 만든 큰 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권태철(權泰哲)·장상용(張相用)이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자, 군중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열창하였다. 출동한 일제군경이 유희철·장상용·조기신을 체포하였으나 시위 열기를 꺾을 수는 없었다. ‘결사대장’이라고 쓴 태극기를 어깨에 두른 유봉진은 종루에 올라 큰 종을 쳐서 군중을 모았다. 웃장터·아랫장터는 시위군중으로 가득하였고, 시위대는 시장에서 향교를 거쳐 군청으로 진출하였다. 향교 앞에서 고익진과 유봉진은 독립의식 고취 연설을 하였고, 시위대는 향교에서 군청으로 진출하였다. 이 날 시장에 모인 군중은 1만 명에 이르렀고, 그 중 군청 앞 시위에 5~6,000명이 참여하였다. 군수 이봉종(李鳳鍾)도 시위대의 협박에 억지 만세를 불렀다. 3시간 동안 독립연설회와 시위행진을 하던 군중은 오후 5시경 경찰서를 포위하고 억류 인사들의 석방을 외쳤다. 시위대의 선봉에 선 온수리의 이봉석(李奉石)은 칼을 든 채 친일순사의 처단을 공언하고 일부 군중은 경찰서에 난입하려 하는 등 과격 양상을 보였다. 일제경찰은 시위대의 위세에 굴복하여 유희철·장상용·조기신을 석방하였다. 시위군중들은 밤 8시 30분 경찰서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