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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지인의 집에 피신시켰다가 체포되었다. 82 만세운동에 참여한 간호사로는 구세병원의 탁명숙 외에 세브란스병원의 김효순(金孝順)·노순경(盧順敬)·이도신(李道信)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1919년 12월 2일 오후 7시경 서울 훈정동(薰井洞) 종묘 앞에서 ‘조선독립 만세’라고 주서(朱書)한 헝겊을 흔들며 2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활동하다 체포되어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언도받았다. 83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김종진(金鍾振)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녀는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시가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리고 그 해 11월 28일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 조직한 대동단(大同團)에서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등이 서명하여 제2회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후 이를 서울 일대에 제작 배포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자 이에 참여하여 자신의 숙소를 거사 논의장소로 제공하였다. 또한 태극기 제작에 협력하는 등 거사를 준비하였으며 안국동(安國洞) 경찰관주재소 앞 광장에 집결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 및 보안법,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언도받고 1년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 84 여성들은 3·1운동을 계속하여 기억하고 그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였다. 43세의 박자선(朴慈善)은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그 해 2월 이동욱(李東旭)이 제작한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상인들의 철시를 주장하는 「경고문」(警告文)을 교부받아 이를 82 「예심종결서」(경성지방법원, 1919.8.30) ;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11.6) ; 『독립신문』 1919.10.14, 「投彈老壯士」 ; 『신한민보』 (1919.10.28, 「사이토 폭발탄사건의 후문」 ; 『매일신보』 1919.11.8, 「전무후무한 대판결, 240명을 한 번에 언도해, 피고의 대부분 은 모조리 학생 」 ; 『매일신보』 1920.2.16, 「총독을 폭격하면 조선독립이 될 줄 알았더냐, 모사는 재인하고 성사는 재천이라 하 였으니 오직 하나님 명령만 쫓을 뿐이라고 강우규의 호어 」 ;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 사단법인 애국동지회, 1956, 107·421 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9,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9, 94∼121·141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 립운동사자료집』 5, 1972, 58∼82·99∼104쪽 ; 『독립운동사자료집』 9, 1984, 345·347·349쪽 ; 『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84, 82·84쪽 ;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84, 94∼121·141쪽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 국사편찬위원회, 1988, 220쪽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7, 1994, 270·277쪽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8, 1994 228·232·237~238쪽. 83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12.18.)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독립유공자사업 기금운용위원회, 1972, 271쪽. 84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0.12.7.) ; 金正明, 『朝鮮獨立運動』Ⅰ, 東京 : 原書房, 1966, 230∼232쪽 ; 최은희, 『추계 최은희 전집』 2 (한 국근대여성사 중), 조선일보사, 1991, 137쪽 ; 『추계 최은희 전집』 3(한국근대여성사 3), 조선일보사, 1991, 130∼133쪽 ; 국사편찬 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 국사편찬위원회, 1988, 245∼2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