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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느끼게 되더이다. 아아 인정도 모르고 의리도 모르는 그 간수들? 다시 생각해도 이가 갈립니다. 지리한 세월이 유수같아 어언간 엄동설한이 되니까 사정없이 올라오는 인왕산의 혹독한 바람! 칼날같은 눈보라가 애처로운 우리의 살을 애는 듯할 때에 수족의 감각은 없어지고 갈 바를 모르고 나오는 애년한 생각은 끝이 없이 배회합디다. 철창을 새니 들어오는 밝은 달은 외로운 우리의 강산을 두루 비추고 고향의 부모형제도 비추련만 부모의 소식을 몰라 홀로 더운 눈물로 베개를 적실 때에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주님께 기도를 올려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백두산에 쌓인 눈과 같이 쌓인 나의 원한을 다 말할 수 없음이 원통합니다. 옥중에서 지은 글 한 귀를 외우겠습니다. ‘해는 지고 바람은 찬데 몰려오는 눈조차 알고 맵도다. 정숙한 이 몸에 포박이 웬 일인가. 무죄한 이 몸에 악형이 웬 일인가. 귀히 기른 이 몸에 철창 생활 웬 일인가. 북악산 머리에 눈이 쌓이고 반야중천에 달은 밝은데 청춘의 끓는 피 참기 어려워 느껴 울음에 목맺히도다.” 78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최정숙(崔貞淑)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최정숙은 학교 동료 최은희(崔恩喜)와 함께 동료들을 규합하여 3·1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수천 군중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내로 행진할 때 이에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내를 행진하다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에 3년간 집행유예를 받아 8월여 옥고를 치렀다. 79 최정숙과 함께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최은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즉 3·1만세시위에 전교생이 참가한 것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가 유일하였다. 고종의 국상을 당하여 전교생이 곡반(哭班)에 나가기를 원하였으나 일본인 교장 시가[滋賀莊三郞]는 각 반에서 한 사람씩만 나가도록 조처하였고 이에 반발한 학생들은 대표가 다녀올 때까지 덕수궁 쪽을 향하여 엎드려 곡하였다. 인산 날까지 40여 일의 애도기간에 학생들은 망국의 한을 감추지 않았다. 최은희는 황해도 출신으로 78 『동아일보』 1920.4.20, 「출옥자(出獄者)의 감상 2」.  79 「예심종결서」(경성지방법원, 1919.8.30) ;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11.6) ;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 사단법인 애국동지회, 1956, 106쪽 ; 金正明, 『朝鮮獨立運動』Ⅰ(民族主義運動編), 東京 : 原書房, 1966, 831∼852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 동사』 2,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9, 113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9,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9, 186·200·231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2, 88∼95·155∼ 184쪽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4, 국사편찬위원회, 1991, 103·104쪽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자료집』 17, 국사편찬위원회, 1994, 123∼127쪽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8, 국사편찬위원회, 1994, 1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