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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연하게 비폭력 평화시위를 전개하여 한 건의 폭행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한 이 자료총서에 수록된 여성은 경성여자고등보통 학교·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이화여학교·정신여학교의 학생과 교사들, 구세 병원·세브란스병원의 간호사들이었다.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학교별로 그리고 독립운동가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화여학교에서는 교사 김독실(金篤實)과 노예달(盧禮達)·신특실(申特實)·유점선 (劉點善)이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화여학교 이문회(以文會)는 2월 28일 정기모임에서 전교생이 모여 일제에 항거하는데 앞장설 것을 결정하였다. 다음 날 소복한 전교생이 덕수궁 대한문(德壽宮 大漢門) 앞에 나가 망곡하고 학생대열에 끼어 독립만세를 고창하고자 계획하였으나 이를 눈치 챈 학교측이 문을 닫아버리고 외국인 교사들이 저지하였다. 그러나 저지하고 있던 수위를 밀치고 15명 이상의 학생이 학교 밖으로 뛰어나가 만세군중과 합류하였다. 이 때 서대문경찰서에서 즉각 출동하여 주동자를 색출하였고 잡지 못하자 두 선생을 조종자라 하여 연행해갔다. 교문 밖으로 나온 15명의 학생들은 남대문 앞에서 각급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고 체포되었다. 당시 교사이던 박인덕(朴仁德)·하복순(河福順)이 주모자로 몰려 투옥되었고, 28명의 여학생이 검거되어 그 중 5명이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이화여학교는 3월 10일 조선총독부의 명령으로 휴교를 당하였다가 그 해 10월 개교하였다. 김독실은 1919년 3월 1일 이화여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는데 파고다공원에서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펼쳤다. 그리고 3월 5일 학생들의 제2차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11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고 3월 이상 옥고를 치렀다. 75 노예달은 1919년 3월 1일 이화학당 고등과 2학년, 신특실과 유점선은 같은 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파고다공원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3월 5일 75 「예심종결서」(경성지방법원, 1919.8.30) ;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11.6)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매일신보』1919.11.8, 「전무 후무한 대판결, 240명을 한 번에 언도해, 피고의 대부분은 모조리 학생」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독립유공자사 업기금운용위원회, 1979, 113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9,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9, 186·196쪽 ; 독 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2, 68∼82·88∼93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3,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84, 65·74∼75·97∼99·107·142쪽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 동사자료집』 17, 국사편찬위원회, 1994, 277쪽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8, 국사편찬위원회, 1994, 2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