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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해제 천도교측의 권동진·손병희·오세창·최린 등은 1919년 1월 중순 경 시위운동을 일으키기 로 결의하고,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의 3대 원칙을 수립하였다. 58 대중화와 일원화 원칙 은 전 민족이 하나의 체계로 민족운동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발전양상이라고 평가 할 수 있다. 더구나 서로 다른 종교단체가 민족문제 해결을 중시하고 민족적 양심으로 뭉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선택한 비폭력원칙은 3·1운동 추진세력들의 계몽주의적 성향을 보 여주기도 하지만, 당시 어떠한 무력수단도 없었던 제약 때문에 취한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 다. 그러나 민중운동이 비폭력으로 진행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은 민족대표들이 가진 한계였다. 개신교측의 시위계획은 평안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상하이에서 파 견된 신한청년당원 선우혁의 활약이 연결고리로 작용하였다. 59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 에 대표를 파견하는 한편 국내와 일본·만주·노령의 독립운동세력과 연결하였다. 선우혁은 1919년 1월말에서 2월 초순경 평안도로 들어와 이승훈·양전백 등 옛 신민회 동지들을 만났 다. 그는 그 자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마무리와 이에 따른 국제회의 소식을 전하며 독립운 동방법을 협의하였다. 그 영향이 평양과 정주, 선천 일원의 개신교회와 개신교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갔다. 60 일본유학생의 2·8독립운동은 국내 천도교 인사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1918년말 유학생 들은 최팔용을 비롯한 10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61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송계백을 국내로 파견하 여 현상윤과 최린 등을 접촉하게 하였다. 62 송계백은 그들이 준비하고 있던 독립선언과 투쟁 방향을 알렸다. 그리고서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00여 명의 한국학 생들이 모여 한국의 독립과 일제와의 혈전을 선언하고 나섰다. 63 이후 국내 천도교 지도자들 58 최린, 「자서전」, 「한국사상」4, 1962, 164쪽; 「장효근일기」 1918.12.1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조선3·1독립소요사건」, 「독립운동사 자료집」6(3·1운동사자료집), 863쪽. 59 김희곤,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 95-96쪽. 6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조선3·1독립소요사건」, 「독립운동사자료집」6(3·1운동사자료집), 891-892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예심종결결정서(김형기 등 학생단)」, 「독립운동사자료집」5, 69쪽. 6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2, 655쪽. 62 전영택, 「동경 유학생의 독립운동」, 「신천지」1권3호, 1946, 98-99쪽. 6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2, 6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