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page

225 해제 “옥중에서는 마룻바닥에 다다미를 깔고 그 위에서 자는데, 사람 4명에 일본 이불 하나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추운지 몸이 모두 얼어서 죄다 터지고 아파 차마 견딜 수 없었습 니다.”라고 하여 겨울철 난방도 되지 않는 싸늘한 감방에서 추위에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상 황이었음을 회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보다도 더 힘들었던 것은 일본인 간수들의 가혹 한 태도였다. 신관빈은 “그러한 중 더욱이 간수의 가혹한 품(品 ; 태도)은 무엇이라 말하여야 옳은지, 그도 사람인가, 인정을 가진 동물인가 의심할 만큼 냉혹하였습니다. 물론 그 속에서 하고 지내는 품이나 대우받은 것은 사람으로서는 받지 못할 만큼 망측한 것 이었습니다”라 고 하여 감옥에서의 처우가 ‘망측’이라고 표현할 만큼 가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92 이러한 상황에서 유관순은 1920년 3월 1일 옥중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가혹한 고문을 당해 결국 1920년 9월 28일 감옥 안에서 옥사, 순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수형기록카드의 출옥연 월일 기재란에 그녀의 출옥일은 1921년 1월 2일로 기록되어있다. 1919년 7월 4일 경성복심 법원에서 3년형을 받았으나 1920년 4월 28일 영친왕과 일본 왕실과의 결혼을 기념한 사면 령으로 1/2이 감형되어 기록된 것이다. 하지만 기록과 달리 유관순은 출옥을 3개월 여 남겨 놓고 끝내 순국하고 말았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특히 여성에게도 일말의 예외가 없었던 일제 식민지 감옥 운영과 처우 가 매우 엄혹(嚴酷)하였던 것이다. 2) 세브란스 간호사 만세운동 일제 강점기 남대문에 위치하였던 세브란스 병원의 간호사로 근무하였던 노순경, 김순호, 이신도, 박덕혜는 기독교인으로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고 3·1운동에 동조하였다. 이 가운데 노순경, 김순호, 이신도의 수형기록카드가 발견되었고 그 기록에 의하면 거주지는 ‘경성 남 대문정 세브란스병원 의학전문학교 부속 간호부 양성소 기숙사’로 되어 있어 함께 간호사로 활동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1919년 12월 2일 종로구 훈정동 대묘(大廟 ; 종묘宗廟)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에 참여하기 위해 미리 깃발을 준비하였다. 태극기 92 《동아일보》, 1920. 4 . 18(『일제하 옥중회고록2-그 분노의 기록들』, 박대희 편, 정음사, 1977, 175~1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