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page

19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이러한 가정 환경과 교육 배경으로 그녀는 지속적인 사회 서적을 접하였고 교육에의 열의 를 가지게 되었다. 집안에서도 그녀의 지속적 교육을 위해 1926년 15세 때 서울로 보내 경성 여자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시절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성격으로 교장의 독단적 인 교사 채용 반대와 한국인 교사의 부당 파면 철회, 학교 설비의 개선을 주장하면서 3번의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행동 지향적 성격은 결국 폭행과 수업 방해로까지 이어져 재 학 시절 서대문형무소에 2번이나 구류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또 1930년 서울 시내 여학생 만세운동 당시 경성여자상업학교의 대표로 학생들을 모으고, 그녀의 하숙집에서 회합하는 등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일로 피체되어 6개월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집 행유예로 2개월 만에 풀려나왔다. 37 출소 후 개벽사에서 기자이자 작가로 활동하면서 여성의 사회 진출과 근대를 지향하는 글, 그리고 고향 북청 관련 글을 다수 남겼다. 38 【사진 13】 송계월의 수형기록카드는 1930년 작성된 것으로 평상복을 입고 있어 피체 직후 경찰서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뒷면에 본적은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면 신창리 번지미 상’, 주소는 ‘경성부 가회동 48번지’, 직업은 ‘여자상업 3년생’, 인치관서(引致官署)는 ‘서대문 경찰서’, 인치사유는 ‘보안법 위반’으로 기재되었다. 구체적인 형기와 재판 언도연월일 등이 미기재된 것으로 보아 미결상태에 기재되었던 카드이다. 37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1, 2002, 65~66쪽, 204~209쪽.  38 송계월, 「우리 가을은 내일 아침에」,《신여성》 5권 9호, 1931 ; 「직업여성의 술회, 학원시대와 현재생활」, 《신동아》, 1932 ; 「북청의 점묘」, 《삼천리》 3권 12호, 1931 ; 「신창 바닷가」, 《신여성》 6권 11호, 1932 등.  【사진 13】 송계월 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