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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해제 1932년 윤봉길의 상해의거에 연루,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안창호의 경우도 국내 압송 직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대전교도소로 이감된 사례이다. 또 그동안 경성형무소에 수감된 것으로만 알려졌던 이규채의 경우, 다음 【사진 9】와 같이 카드를 통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1924년 임시정부 의정원, 1932년 만주 한국독립당 총무위원장을 지냈으며, 1932년 9월 제1차 쌍성보 전투에서 참모장을 역임하였던 그는 1934년 11월 상해에서 피체된 후 국내로 압송되었다. 21 압송 직후 서울 본정경찰서 형사과에서 찍은 사진으로 1차 카드가 작성되었고, 검찰에 기소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후 미결수로 찍은 사진으로 2차 카드가 작성되었다. 그리고 3년 후 기결감이었던 경성형무소에서 기결수로 찍은 사진으로 3차 카드가 작성되었다. 각 시기마다 카드를 작성한 것은 피체 당시의 모습, 수감되었을 당시의 삭발한 모습, 수형 기간이 긴 경우 중간의 변화된 모습을 시시각각 담아 추후 재범 시 바로 해당 인물을 알아보기 위한 조치였다. 22 [ 1935년 1월 25일 본정경찰서 형사과에서 촬영 23 (1차) ] 21 박경목, 「독립운동가의 회고 기록 『이규채 연보』해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7,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4, 239 쪽 ; 「이규채 신문조서(2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3, 국사편찬위원회, 2000, 42쪽. 22 장기수의 경우 용모와 기타 특징의 변화 파악을 위해 5년 이내 재촬영하였다(서대문형무소직원교우회, ‘在所者寫眞撮影 及 取 扱 手續’, 『서대문형무소 예규류찬』, 1939, 75쪽). 23 이 카드의 촬영 날짜가 소화 9년(1934)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소화 10년(1935)의 오기이다. 이규채가 피체된 날짜는 1934년 11월 2일이고, 상해에서 서울로 압송되어온 시점은 1934년 11월 18일 이었기 때문이다(박경목, 앞의 글, 2014, 240~242쪽). 【사진 9】 이규채 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