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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해제 기전여학교 학생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장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시위군중은 우편국·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일제경찰은 공포를 쏘고 말을 탄 채 총대를 휘둘러 시위군중을 해산시켰다. 이 때 앞장서 달리던 임영신(4회 졸업)이 경찰에 맞아 기절하였고, 김공순(3회 졸업), 김신희(졸업반), 송순이(졸업반), 최금주(졸업반), 최애경, 최요한나(2학년), 정복수(2학년), 함연춘·함연순(2학년) 자매 등이 체포되었다. 172 그 날 오후 500여 명이 오목대에 모여 본정우체국으로 몰려가자 일제경찰은 일본도를 휘둘렀고, 소방대원도 소방차를 이끌고 와서 갈쿠리로 찍어댔으며 빨간 물감을 만세시위군중의 옷에 뿌리고, 해산한 사람들 중에서 물감 묻은 사람만 체포하였는데 200여 명이었다. 그 날 밤 9시경 기전여학교의 강정순·김나연·김순실·김인애·함의선(당시 교사이며 3회 졸업생) 등이 주동이 된 230명의 시위대가 도청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구속된 동포들을 석방하라고 외치다가 검거되었다. 그 날 밤 12시경 일제는 체포한 만세시위자들에게 용수를 씌우고 일본 짚세기를 신겨 반대미에 있는 감옥에 구속하였다. 감옥은 퀴퀴한 냄새가 가득하였고 시멘트 바닥에 가마니를 깔았다. 여간수가 입회하여 강제로 모두 옷을 벗게 하고 성경, 찬송가, 약간의 돈을 모두 빼앗았다. 저고리 옷고름도 떼어갔다. 먹을 수 없는 콩과 보릿덩이에 소금절인 무 한 쪽을 아침밥으로 주었다. 김신희는 “내 일생에 그 때처럼 밥 맛 없어 보기는 처음이었다”고 회고하였다. 강정순·김공순·김나연·김순실·김신희·김인애(최기물)·송순희·임영신·정복수· 최금주·최애경·최요한나·함연춘 등 기전 여학생 13명은 10일만에 검찰에 송치되었다. 20여 일 동안 일제검찰이 문초하였으나 어떠한 소득도 얻지 못하자 기소하였다. 재판에 회부되어 첫 번 법정에 출두하던 날 광주지방법원전주지청은 인파로 붐볐다. 전주민들의 입과 입을 통해 기전여학교 학생들의 행동이 알려진 때문이었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용수가 씌워져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기전 여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해 시학관 다나까[田中]를 감옥에 보내 미국 등에 유학시켜 준다고 회유작전을 폈으나 실패하였다. 3개월 후인 6월 10일 갑자기 보석이 허가되었다. 미리 보석을 알게 된 부모들이 인력거를 보냈다. 집이 서원 너머인 김신희 집에서는 가마를 두 쌍 갖고 나와 임영신과 함께 데리고 172 기전80년사편찬위원회, 『기전80년사』, 1982, 186~1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