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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해제 배상근(裵祥根)·김진옥(金振玉) 등이 인근 임실·익산·이리·김제·옥구·정읍·부안 등지로 이를 전파하면서 확산되었다. 3월 2일 김태경(金太京)은 전주 천도교 교구실에서 「독립선언서」 9매를 받아, 유원(柳源) 외 4명에게 나누어 주는 한편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유원·민영진(閔泳軫) 등은 서호순(徐鎬淳)·이달수(李達洙)·유명선(柳明善)·양영화(梁永 化)·이완옥(李完玉)·유선태(柳先泰) 등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한편 개신교측에서는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 165 등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김가전(金嘉全)·김종곤(金鍾坤)·윤건중(尹建 重)·이수연(李守淵)·최종삼(崔宗三) 등은 학생들을 동원하는 한편 김한순(金漢淳)·박 태련(朴泰鍊)·유병민(柳秉敏)·최종삼·함의선(咸義善) 등은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의 일부 학생들과 신흥학교 지하실 등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다. 이들은 3월 13일 전주읍 장날을 만세시위날로 정하고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천도교측에서도 김진옥·배상근 등이 천도교 교구실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 수천 장을 등사하는 등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3일 12시 30분경 강선칠(姜善七)이 태극기가 든 가마니 1개를 보통학교 교정에 갖다 놓음으로써 만세시위 준비는 끝났다. 오후 1시경 이들은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전주면 서정에 위치한 공립제2보통학교 부근에서 대정정 우편국 부근까지 가두시위를 하였다. 이운영(李云泳)이 선두에서 태극기를 높이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였으며, 강선칠·강준구(姜俊求)·김병학(金炳學)·김봉추(金鳳樞)·김재흥(金在 興)·김정희(金錠熙)·김진영(金鎭永)·박덕주(朴德柱)·서병규(徐丙珪)·서봉운(徐奉雲) ·유완진(柳完鎭)·이승우(李承祐)·이영직(李英稙) 등도 함께 만세를 부르며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출동한 일제경찰에 의해 우체국 부근에서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3월 14일에는 오후 3시경 권봉화(權奉和)·김경신(金敬信)·김대희(金大熙)·김봉호(金 鳳昊)·김수천(金壽千)·김인철(金仁喆)·김점쇠(金點釗)·노성용(盧成用)·박상선(朴尙 鮮)·박찬문(朴贊文)·배순길(裵順吉)·배윤명(裵允明)·백남두(白南斗)·이판쇠(李判釗) ·최갑쇠(崔甲釗)·최병태(崔炳台) 등이 전주 완산교 부근에서 한국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본정 쪽으로 가두행진을 하였다. 출동한 일제경찰이 주동자들을 체포하자, 시위대는 165 1902년 1월 전주군 이동면 화산리(伊東面 華山里)에 설립되었다. 초대 교장은 윌리엄 전킨(William M. Junkin)의 아내 메리 레 이번 전킨(Mary Leyburn Junkin) 여사였다. 이들 부부는 1902년 군산 영명학교, 멜본딘 여학교를 설립하여 가르쳤다.(이재근, 「남장로교의 전주 신흥학교·기전여학교 설립과 발전(1901-1937)」, 『한국기독교와 역사』 42, 2015, 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