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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3월 하순, 남해·울산에서는 4월 상순에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중순부터 4월 하순까지 179회의 크고 작은 시위가 거의 매일 전개되었고, 연인원 10만명이 시위에 참여한 경남의 3·1운동은 충북에 이어 전국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점화되었지만 어느 곳 못지 않게 치열하고 완강하게 전개되었다. 179회의 시위 중 44회는 일제의 발포에 맞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20회는 관공서와 일본인 집, 일본인 관공리와 친일파들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81명이 사망하고, 233명이 부상당하였으며, 754명이 검거되었다. 또한 시위군중에 의하여 경찰서 15개소, 헌병분견소 7개소, 군·면사무소 7개소, 우편소 6개소, 기타 8개소 등이 파괴되어 일제의 통치기반에 큰 타격을 주었다. 157 이 자료총서에 수록한, 경상남도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여성은 통영의 이소선(李小先)·정막래(丁莫來)이다. (1) 통영군(統營郡) 통영군의 만세운동은 158 1919년 3월 9일 통영면 서정에 사는 개신교신자 진평헌 외 19명이 「독립선언서」를 시내에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기도하면서 시작되었다. 18일에는 통영면 신정 출신의 개신교 신자 이봉철 외 2명이 통영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날의 만세시위에 통영면 신정의 한문학당인 관란재(觀瀾齋)의 학생 박상건(당시 17세) 등 서당학생 20명이 적극 참가하였다. 22일에는 일제의 하급행정기관의 관공리들도 시위준비에 참가하거나 만세운동을 직접 주동하였다. 면서기 3명, 군청 직원 3명, 산림 기수 1명 등이 청년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모의하다가 검거되었다. 28일 오후 5시경에는 통영면 박성일·조일정 외 7명이 부도정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 검거되었다. 김재욱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종이 깃발을 작성하여 재봉업자인 박성일 등과 함께 장날에 모인 1,000여 명의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운동을 주동하였다. 이 날의 만세운동은 포목상·해물상·재봉업자 등 중소상인과 자영업자가 사전에 계획하고 조직한 것이었다. 31일에는 ‘경남독립회’ 명의로 통영면장에게 경고장이 발송되었는데 지식인, 청년, 학생들의 157 김상환, 「경상남도 3·1운동의 전개양상과 특징」, 『지역과 역사』 29, 부경역사연구소, 2011. 15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1979, 254~300쪽 ; 김상환, 『일제시기 통영의 3·1운동과 민족운동의 전개』, 도서출판 제일, 2005 ; 김진호·박이준·박철규, 앞의 책 2009, 275~277쪽 ; 이동근, 「1910년대 ‘기생’의 존재양상과 3·1운동」, 『한국민 족운동사연구』 74, 2013, 1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