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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교회신자들에게, 권의윤·김영서·백남채·최경학·최상운은 계성학교 학생들에게 독립만세 소식을 알리면서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신명여학교 학생들을 참여하게 한 인물은 김구생과 신명여학교 교사 이재인(李在寅), 졸업생으로 교사인 임봉선(任鳳善), 그리고 학생 이선애(李善愛)였다. 그리하여 계성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 신명여학교 학생들과 성경학교 강습생들이 3월 8일 서문 시장 독립만세에 참여하게 되었다. 3월 8일 김태련·이만집 등은 교회측 인사 수십명과 함께 시장의 군중 사이에서 학생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먼저 수업을 마친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귀가하는 척하면서 시장 주변으로, 기숙사생들은 동산 산림 속을 지나 시장 안으로 띄엄띄엄 흩어져 들어왔다. 신명여학교 학생 일부도 동산의 서쪽과 북쪽의 가파른 언덕길을 더듬어 내려왔다. 그리고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백남기·신현욱·하범 등은 수업하는 교실을 돌며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에 전교생이 교사들의 제지를 물리치고 교문을 나와서 계성학교 학생들과 합류하여 서문 시장으로 들어갔다. 이어 박장호(朴章鎬)가 성경학교 강습생을 이끌고 뛰어왔다. 그러자 경계태세로 감시 중이던 일제경찰들은 학생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제지하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대구에서 활동하였던 임봉선은 대구 신명여학교 교사로서 1919년 3월 8일 여학생 50여 명을 주동하여 대구 서문 시장에서 계성학교 남학생과 합세하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하다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53 (2) 영덕군(盈德郡) 영덕의 3·1운동은 154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평양으로 가던 중에 잠시 서울에 머물렀다가 서울의 3·1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지품면 낙평동(洛坪洞) 장로교회 조사 김세영(金世榮)에 의해 시작되었다. 평양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어 신학교가 휴교에 153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19.4.18)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9, 349·352쪽 ; 『독립운동사』 9, 1979, 270~271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1265·1268쪽. 154 경상북도경찰부 편, 『고등경찰요사』, 1934, 32~33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영덕의 독립운동사』, 영덕군, 2003 ; 김진호·박이준·박철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318~321쪽 ;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안동독 립운동기념관, 경상북도, 2013, 404~4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