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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주선으로 이화학당의 교비생(校費生)으로 편입되었다. 고등과 1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5일 남대문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의 명령으로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독립선언서」를 감추어가지고 귀향하였다. 그리고 인근의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 등을 순방하며 만세운동 참가를 권고하였다. 그리하여 4월 1일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1일 오전 9시 3,0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조인원(趙仁元)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 장터는 시위군중의 만세소리로 가득하였다. 이 때 그녀는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시위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오후 2시경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 명이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으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씨(李氏)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그녀는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공주검사국으로 송치되었는데 여기서 공주 영명학교 학생대표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된 오빠 유우석(柳愚錫)을 만났다. 그녀는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받고 공소하여 1919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감옥 8호 감방에서 수감되었다. 8호 감방에는 김향화, 신관빈, 어윤희, 이순화 등 3·1운동의 여성 투사들이 함께 있었다. 1919년 7~8월에 감방 동료들이 모두 가출옥되었고, 12월에 대동단사건으로 이신애가 8호 감방으로 들어왔다. 유관순은 이신애와 함께 감방 동지들과 비밀리에 연락하여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준비하였다. 1주년이 되는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에 감옥이 떠나갈 듯이 만세를 부르자 3,000명이 넘는 수감자들이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이 사건으로 이신애와 유관순은 감방 밖으로 끌려가 심하게 매를 맞았다. 유관순은 끝내 굴하지 않았고 더욱 심하게 매를 맞아 방광이 파열되었다. 그리고 그 해 9월 28일 감옥에서 순절하였다. 150 150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6.30) ; 「판결문」(고등법원형사부, 1919.9.10) ;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 독립문화사, 1970, 198쪽 ;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 사단법인 애국동지회, 1956, 150·173·444·528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1979, 113쪽 ; 『독립운동사』 3, 1979, 120·121·122·123·124·125쪽 ; 『독립운동사』 9, 1979, 257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 운동사자료집』 5, 1972, 1162~1165쪽 ; 박용옥,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31 : 여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140~1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