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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이규상에게 전해듣고 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의한 김현경(金賢卿)도 이규남이 제작한 태극기를 이규상으로부터 받아 집에 모여 있던 영명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시장으로 가서 김수철 등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144 이 날의 만세운동은 일제경찰의 출동으로 제지당하였고, 강윤·김관회·김수철·김현경·노명우· 양재순·유준석·윤봉균·이규남·이규상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공주에서 활동하였던 김현경은 공주군 공주면 본정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1일 공주면의 공주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여러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8월 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145 (2) 천안(天安) 천안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146 1919년 3월 14일 오후 4시경 목천보통학교의 학생 약 120명이 교정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주동자 4명이 체포되었다. 3월 20일 아침 광명여학교(光明女學校)의 교사와 학생 수십 명이 직산금광(稷山金鑛)의 광부와 부근 주민 약 70명과 함께 양대리(良垈里) 시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하장리(下場里)의 입장시장(笠場市場)으로 향하여 약 6~700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출동한 천안헌병대에게 남자 40명, 여자 10명이 체포되었다. 3월 28일 아침 7시 반경 직산금광회사의 광부 약 200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저지하는 일제헌병과 충돌하면서 양대 헌병주재소를 습격하고 일제헌병의 무기를 빼앗으려 하고 전화줄도 절단하였다. 이때 8명이 체포되고 일제헌병의 발포로 6명이 부상당하였는데 그 중 2명은 사망하였다. 144 그런데 만세운동 당시 충청남도청 순시 김봉인(金鳳仁 : 44세)이 영명여학교에 통학하는 자신의 맏딸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조사를 받자 자식교육을 잘못한 자신의 책임이라며 면도칼로 자신의 배를 갈라 자살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수록되었다. (『매일 신보』 1919.5.26, 「면목이 없다고 할복한 순경」) 145 「예심종결결정서」 (공주지방법원, 1919.7.28.) ; 「판결문」(1919.8.29, 공주지방법원) ; 「수형인명부」 ; 『매일신보』 1919.9.3,「공주소 요범인 판결」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9, 108 ; 『독립운동사』 9, 1979, 256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 운동사자료집』 5, 1972, 1137~1140쪽 ;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84, 70쪽. 146 金正明, 『朝鮮獨立運動』Ⅰ, 1966, 375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1979, 116~126쪽 ; 김진호·박이준·박철규, 앞의 책, 2009, 95~96쪽 ; 천안문화원, 『천안독립운동사』, 1995, 91~92쪽 : 정래수, 박사학위논문, 2001, 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