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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총 설 선장에서는 4월 4일 정수길(鄭壽吉) 등 4명이 독립만세를 결의하고 군덕리시장에서 약 200여명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오후 3시경 막대기를 휘두르며 헌병주재소 건물·창문을 파 괴하였다. 특히 김천봉(金千鳳)이 선두에서 주도하였다. 6) 홍성군 광천에서는 3월 8일과 18일에 이명종(李鳴鍾) 주도로 유인물을 통한 독립 의식의 고취가 있었다. 그는 3월 6일에 박원식(朴源植) 집에서 박세화(朴世和)에게 서울 3·1운동 상황을 듣고 독립선언서를 보고 독립만세를 결의하였다. 이들은 3월 8일 선언서를 참고로 그 내용 을 양지 2장에 적어 시장과 옹암리 2개소 벽에 부착하였다. 일경들이 제거하자, 이들은 선언 서를 등사하여 가정에 배부하고 광천시장 장날에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이후 최응모 (崔應模)·오인섭(吳仁燮)·성배호(成培鎬) 등이 참여하였다. 3월 16일 박원식이 스승 서승 태(徐承台)에게 선언서를 보이고 편의하고 간략한 내용으로 작성을 부탁하였다. 이틀 후 서 승태는 박원식·오인섭에게 문구를 가제(加除)하여 필기하게 하였다. 이어 박원식·이명종 등 오인섭 집에서 박원식이 필기한 원고를 참고로 각자 복사지로 약 510매를 만들어 밤에 이 명종·성배호·오인섭 등이 광천·옹암리에 배포하였다. 금마에서는 4월 1일에 민영갑(閔永甲)이 이재만(李載萬)과 가산리 연극 공연장인 이원교 (李元交) 집에 모이는 군중과 독립만세를 부르기를 하고, 이어 최중삼(崔仲三·八龍) 등이 참 여하였다. 조한원(趙漢元)은 오후 8시경 연극 공연 중에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관중 수십 명 이 독립만세를 따라서 고창하였다. 장곡에서는 4월 4일과 7일에 윤형중(尹衡重) 형제·김동하(金東河·東化) 주도로 독립만 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윤낙중(尹樂重·己順)은 경신학교 학생으로 3월 1일 만세를 부르고, 윤익중(尹益重·世重)은 독립선언서 100여매를 가지고 함께 3월 20일에 귀향하였다. 이들 은 윤의석(尹宜錫)과 독립만세를 준비하고, 4월 4일에 윤만수(尹萬洙)·최기석(崔奇石) 등 화계·광성·신풍리 주민 100여명과 매봉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 어 4월 7일에는 김동하(金東河·東化)가 김동완(金東完) 등 화계리 주민들과 앞산에 모여 독 립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오후 8시 광성·가송리 등 주민 300여명과 면사무소 뒷산 응봉산에 올라 한상철(韓相喆)의 일제 만행 규탄 연설과 독립선언문 취지 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