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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총 설 이 흐트러지자, 군중들은 격투를 벌렸다. 이어 군경들이 서광순(徐匡淳)·정재철(鄭在喆)을 체포하자, 군중들은 다시 구출을 시도하였다. 김정쇠·전정길(全鼎吉)은 목원순사에게 덤벼 체포를 방해하고, 문백룡·장기현 등은 순사를 물어 뜯었다. 이동안은 이근남에게 “너는 이 근남이 아니냐? 너도 조선사람인데 어째서 만세를 부르지 않느냐?”며 주먹으로 구타하고, 중성 헌병군조 칼을 탈취하려고 실랑이를 벌였다. 이에 중성군조 등이 발포하여 이상림(李相 霖)이 순국하고 10여명이 중경상을 당하였다. 4) 연기군 전의에서는 3월 13일에 이수욱(李秀旭)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2월 26 일 상경하여 서울 3·1운동을 목격하고 3월 6일 신정리로 귀가하였다. 바로 추경춘(秋敬春) 과 협의하고, 다음날 밤 박성교(朴聖敎) 집에서 추득천(秋得天)·윤자벽(尹滋璧) 등과 3월 13 일 읍내 장날 독립만세를 합의하였다. 3월 8일에는 김병옥(金炳玉) 집에서 정원필(鄭元弼) 등과 결의하고 태극기 약 150기를 만들었다. 이들은 3월 13일 오전 9시경 갈정리고개에서 시장가는 주민들에게 독립만세와 타인에게 참가 권유를 부탁하였다. 또 태극기를 주며 품속 에 숨겨다가 연설을 할 때 일제히 꺼내 만세를 외치며 읍내를 행진하자고 당부하였다. 12시 40분경 시장에서 이수욱이 약 150여명에게 연설을 하고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주창하였다. 사전에 약속한 추경춘·윤상원(尹相元) 등과 시장에서 참여한 이수양(李秀陽) 등은 윤자벽· 윤자명(尹滋明)에게 받은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과 만세를 외쳤다. 군중들은 이수욱을 선두로 만세를 부르며 읍내를 활보하였다. 조치원읍에서는 연기청년회의 활동 속에 3월 30일에 홍일섭(洪日燮) 주도로 독립만세운 동을 전개하였다. 연기청년회 김재형(金在衡) 등은 고종 국장 참례 때 서울 3·1운동을 목격 하고 귀향하여 독립만세를 준비하던 중 3월 23일부터 연기와 청주의 횃불만세운동에 힘입 어 홍일섭을 추대하여 독립운동을 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들은 3월 30일 아침에 시장 길목에 서 지역민들에게 독립만세를 부탁하였다. 오후 2시 홍일섭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이에 군중들도 독립만세를 합창하였다. 연기청년회원들은 시장을 다니며 독립만 세를 유도하였다. 한편 김재형은 3월 1일 경성기독교회관 앞에서 박동완(朴東完)에게 경고문 500매를 받아 귀향하여 숨겨두었다. 그는 3월 25일에 김재석(金在錫)에게 약 350매를 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