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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윤봉균(尹鳳均) 등에게 통보하고, 29일에는 졸업생 이규남에게 태극기 제작을 의뢰하고, 30 일에는 자택에서 통보 학생들에게 김관회의 뜻을 전하여 동의를 얻고, 양재순(梁載淳)에게 도 찬동을 얻었다. 그리고 31일에는 오후 3시경 통보 학생 등과 기숙사에 모였다. 이들은 윤 봉균이 국장 때 구해 온 독립선언서로 신성우(申誠雨)가 등사하고, 유준석이 절반을 접어 1,000매를 만들었다. 이규상은 박루이사(朴婁以士)에게 공립보통여학교 학생의 참여 승낙을 얻었다. 박루이사는 3월 27~28일경 영명여학교 여교사 이원용(李元鎔)을 만나 여학생과 그 가족의 참여 권유하했으나 거절당하였다. 현언동도 3월 30일 농업학교 교사 이성구(李晟求) 집에서 학생 참여를 권유했으나 거부당하였다. 4월 1일에 김수철·노명우·윤봉균은 이규남 에게 태극기 1개씩을 받아 휴대하고, 노명우·유준석·강연·양재순은 독립선언서 100매씩 을 가지고 시장으로 나가 오후 2시 선언서를 배포하며 만세를 외쳤다. 김현경(金賢敬)도 이 규남에게 태극기를 받아 영명여학교 학생과 시장에 나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 군중 들은 오후 6시까지 독립만세를 외쳤다. 정안에서도 같은 날 이기한(李綺漢)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기한·이병억 (李秉億)은 석송리 주민에게 독립만세를 호소하였다. 이기한이 “모두 나를 따르라”며 선두에 서자, 이동안(李東案·東葉) 등 2~30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광정리로 향하고, 조금 후 조정관(趙正觀)도 태극기를 들고 따랐다. 내송리에서 12시경 모범림 식수 작업을 마친 운궁 리 최범성(崔範聲)·윤원식(尹元植) 등이 합세하였다. 광정리에서 군중들 가운데 3~4명이 먼저 쇠스랑·곡괭이·삽 등으로 주재소를 파괴하였다. 이기한도 “주재소를 파괴하자!”, “왜 구경만 하느냐? 빨리 부수라!”며 태극기 깃대로 문등을 깨뜨렸다. 윤원석·이월성(李月星) 등은 게시판·유리창 등 시설물과 건물을 파괴하였다. 오후 3시에 상황을 접수한 공주경찰 서는 순사 목원신차랑(木原新次郞)·황산일이(黃山逸二)·순사보 이근남(李近南)·헌병군조 중성미길(中聖美吉) 이하 병졸 5명을 광정리로 급파하였다. 이들은 오후 4시 40분경 석송리 주막 김원일(金元日) 집에 이르렀다. 이때 석송리로 돌아와 휴식하던 14~5명이 자동차를 막 고 손을 흔들며 한국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부근 주민이 호응하여 4~50명으로 늘어났다. 하차한 목원순사가 이동안의 왼손을 결박하고 오른손마저 잡으려 할 때, 노규현(盧奎鉉)· 장기현(張基鉉) 등은 “그가 무슨 죄가 있어 잡아 가려는가?”며 순사를 떠밀고, 김정쇠(金正 釗)·문백룡(文白龍)은 순사 어깨를 밀쳐 포박을 저지하여 이동안은 풀려났다. 군경의 대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