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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감리파 오기선(吳基善)·신홍식(申洪植) 등과 기독교 동지 규합과 일제 정부에 독립청원서 제출에 합의하고, 원산의 동지 규합은 정춘수가 맡기로 하였다. 같은 날 함태영 집에서 함태 영(咸台永)·이갑성(李甲成)·안세환(安世桓)·오상근(吳尙根)·현순(玄楯) 등과 회합하였으 나 결의는 없었다. 2월 21일 이승훈은 최남선과 처음 만나 최린 집에서 전날 협의사항을 전 달하였다. 이에 최린은 “독립운동은 민족 전체에 관한 문제이므로 종교의 종류를 불문하고 합동함이 가하다”며 천도교와 기독교의 합동을 요구하였다. 이승훈은 동지와 협의 후 여부 를 전달하기로 하고, 독립운동비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날 밤 이갑성 방에서 이갑성·박희 도·오기선·오화영·신홍식·함태영·김세환·안세환·현순 등이 철야로 협의하여 합동 문제는 천도교측 방법을 확인 후 결정하되 이승훈·함태영에게 일임하고, 독립청원서 제출 동지 모집과 서명 날인을 위해 이갑성을 경상도로 김세환을 충청도로 파견하고, 파리강화회 의 형세 탐문과 보도 및 유럽에 문서 발송을 위해 현순을 상해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에 현 순은 2월 23일 상해로 출발하였다. 한편 최린이 독립운동비 5,000원 요청을 손병희에게 전달하자, 손병희는 대도주 박인 호(朴寅浩)·금융관장 노헌용(盧憲容)에게 지출을 명하였다. 2월 22일 최린은 독립운동비 5,000원을 받은 즉시 이승훈에게 전달하였다. 이어 이승훈은 함태영과 최린 집에서 천도교 측 독립운동 방법을 타진하였다. 최린은 독립청원서 제출만으로 불충분하며 독립선언을 하 지 않을 것 같으면 합동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승훈·함태영은 오기선·박희도· 안세환과 숙의하여 천도교측 주장을 수용하고, 2월 24일 이승훈·함태영이 최린에게 전달 하였다. 이로써 3·1운동에서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연합이 2월 24일에 성립되었다. ③ 독립선언 준비와 민족대표 선정 : 최린·이승훈·함태영이 협의하여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선언, 독립선언서는 3월 1일 배부하고 독립만 세 고창, 지방에서 독립선언 일시와 선언서 배부는 경성의 예를 따를 것, 선언서·기타 서류 기초와 인쇄는 천도교측, 선언서 배부는 천도교·기독교측, 일제 정부·귀중 양의원 서면 제 출은 천도교측, 미국 대통령과 열국 강화위원 서면 제출은 기독교측이 담당하고, 민족 대표 자는 천도교측·기독교측 각각 십수 명, 불교도도 가입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최남선은 2월 상순경부터 최린과 자주 회합을 가졌다. 그는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다…’는 독립선언서, 일제정부·조선총독부·귀중 양의원 의견서, 미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