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page

87 총 설 순사보 박용진(朴龍珍)에게 황병주를 연행하게 하였다. 이에 이승현(李升鉉·聖鉉)은 약 100 여명에게 “어찌하여 너희들은 가만히 보고만 있는가?”, “황병주를 구출하려 주재소로 가자” 고 독려하였다. 한편 황연성(黃璉性)은 하재옥 집 앞에서 박준빈(朴準斌) 등과 독립만세를 부 르고 있었다. 정희준(鄭熙準)은 군중에게 “너희도 조선인이 아닌가? 어째서 만세를 부르지 않느냐? 빨리 만세를 부르자!”며 참여를 유도하였다. 이승현·황연성이 군중을 이끌고 주재 소로 갔다. 황연성·박준빈은 고산순사에게 “어째서 황병주를 석방치 않는가? 즉시 석방하 라!”며 가슴을 내려쳤다. 현우석(玄宇錫)은 문·문등을 부수고, 이정춘(李正春)은 창문·유 리창을 파괴하고, 김상규(金相圭·相敎)도 유리창을 파손하는 등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공주에서는 3월 17일과 4월 1일에 김희봉(金喜鳳)·김수철(金洙喆) 주도로 독립만세운동 을 전개하였다. 황병주 등 20여명이 공주경찰서로 압송되자, 김희봉은 황병주를 이어 독 립만세를 결심하였다. 그는 3월 17일 오후 5시 공주시장에서 군중에게 독립만세를 권유하 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이에 약 1,000여명이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한편 박장래(朴 璋來)는 2월 28일 상경하여 3월 8일까지 서울 3·1운동을 목격하고 ‘조선독립가’를 배워 공 주로 내려왔다. 그는 3월 10일에 김수철(金洙喆) 방에서 안기수(安期壽)·신의득(申義得)에 게 독립운동 상황을 말하고 “공주 학생들은 무슨 까닭에 독립시위운동을 하지 있지 않느냐?” 묻자, “공주에는 영명학교 생도 10여명뿐이라 시위운동을 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박장래 는 “공주에는 농업학교도 있고 보통학교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경성에서는 여학생 까지 나서서 독립시위를 하는 판에 공주에서는 남자다운 의기와 용기가 없는 자들이 많다” 며 독려하고, 독립가를 주어 안기수는 그림 엽서에, 신의득은 시계 수리 보관증에 기록하였 다. 이어 현석칠·안창호(安昌鎬)·김사현(金士賢) 등은 3월 24일 오후 9시경 영명학교 교실 에서 회합하였다. 오익표(吳翼杓)가 각지에서 만세운동을 하므로 공주에서도 하자고 설득하 자, 참석자들은 동의하고 역할을 분담하였다. 현석칠은 전체 지휘, 김관회(金寬會)는 독립선 언서 인쇄·반포와 영명학교·보통학교 남학생, 현언동(玄彦東)은 공주농업학교 학생, 이규 상(李圭尙)은 영명여학교·보통여학교 학생, 오익표는 외부 지방민, 안성호(安聖鎬)는 지방 민 참가를 권유하고, 4월 1일 오후 공주시장에서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김관회는 3월 25 일 김수철을 만나 영명학교 학생의 참가 동의를 얻은 후 독립선언서 1,000매 인쇄를 의뢰하 며 10원을 지급하였다. 김수철은 귀향 중인 유준석(柳俊錫)·노명우(盧明愚)·강연(姜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