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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하고 「독립선언서」·「국민회보」·「독립신문」을 배포하며 독립만세를 부르며 참여를 이끌었 다. 4월 1일에는 김직원·박종병(朴宗秉)이 ‘조선이 독립된다’는 신념을 갖고 인동시장에서 군중과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들은 약 400여명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태극기를 흔 들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이에 군중들도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유성에서는 3월 16일 이권수(李權秀)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조선이 독 립되어 각처에서 만세를 부른다’는 말을 듣고 이상수(李祥秀)와 3월 16일 시장에서 독립만세 를 부르기로 하였다. 이들은 3월 15일 태극기 대형 1기와 소형 17기를 만들고 주민들에게 ‘조 선이 독립하였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지족리에 게양하였다. 3월 16일 오후 1시 유성시장에 서 이정석(李貞石) 등에게 “대한민국은 독립을 하게 되니…독립만세를 외치자”며 호소하였 다. 이상수가 태극기를 주며 이권수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약 200여명이 합세하였다. 2) 천안군 입장에서는 3월 20일과 28일에 민국석(閔國錫)·안시봉(安時鳳)·박창신(朴昌信) 등 주도 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민국석·한이순(韓二順)·황금순(黃錦順)은 광명학교 학생 으로 3월 17일에 학생들에게 독립만세를 권유하고 학교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또한 안 시봉은 직산 금광 광부로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3월 20일 오전 10시경 민국석 등 학 생 약 80명이 양대리시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안시봉도 대형 태 극기를 흔들며 참여하였다. 이어 학생과 김병렬(金秉烈)·김채준(金採準)·조쌍동(曺雙童) 등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며 입장시장으로 가서 6~700명과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한편 광 명학교 교사 강기형(康琦衡)도 학생과 주민들을 따라 시장으로 가서 모자를 흔들며 독립만세 를 부르고 입장시장에서도 만세를 고창하였다. 박창신은 3월 25일 안은(安銀)·한근수(韓根 守) 등에게 만세운동을 권유하였다. 이들은 3월 27일 박창신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다음 날 교대시간에 독립만세를 권유하여 갱부들과 입장시장에 가기로 하였다. 3월 28일 아침 6 시 30분경 광구에 도착하여 교대 광부들에게 권유하여 광부들이 광구 앞에서 대한독립만세 를 부르고 입장시장으로 갔다. 약 200여명은 양대리 헌병주재소 헌병과 천안 철도원호대 보 병을 만나 제지를 받았다. 군경들의 체포에 군중들은 7시 반경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군 중들은 헌병과 무기 탈취 및 격투를 벌이고, 전화선 등 기물을 파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