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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였다. 이어 3월 30일에는 이채연·이헌주 등이 서산경찰주재소에 구금된 학생 구출을 위해 독립운동을 폈다. 이헌주·이관연(李觀然)·이기주(李箕周) 등은 영동과 무주간의 도로 공 사에 동원된 양산 면민들과 주재소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오후 2시경에 서산주 재소에서 이채연은 면민 200여명에게 손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어 이헌주·이관 연·이기주 등 10명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군중들이 주재소를 공격하여 이흥연·이성주 를 탈출시키고, 돌로 유리창을 깨뜨리고, 실내에 들어가 전화기 등을 파손하였다. 이어 일경 들에게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4월 3일에는 양봉식(梁鳳植) 등이 서 산리시장·면사무소·주재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2~3일 전부터 면내를 돌며 독립만세를 권유하여 4월 3일 오후 3시경 면민들과 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로 이 동하였다. 면장 여규원(呂圭圓)이 면사무소 앞에서 온 이유를 묻자, 양봉식 등이 “면장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려고 왔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면장이 2~3회 독립만세를 부르자, 면민들 은 일단 떠났다. 이어 오후 4~6시경 서산리시장에서 5~60명이 양봉식·이기영(李璣榮· 基永·武敬)·정해용(鄭海容·元日) 등 주도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오후 7시경 군 중 일부가 다시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고, 면장은 면서기 이철주(李喆周)와 사태 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때 3·4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서북방 쪽에서 면사무소 앞을 지나 남쪽으로 갔다. 이어 약 3~40분 후 사환이 “아암리 방면에서 다수 군중이 만세를 위해 면사 무소를 습격하러 오고 있다”는 급보를 전하자, 면장·면서기는 급히 뒷편 버드나무 아래 흙 더미로 몸을 숨겼다. 오후 8시경 양봉식·이기영·전만표(全萬杓·明國)·이건양(李建陽) 등 300여명이 면사무소에 도착하였다. 양봉식이 판문(板門) 행랑 아래에서 상묘(桑苗) 배부 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이어 “상묘를 처분하자”는 소리가 나왔고, 군중들도 공감하여 박수 를 쳤다. 면민들은 상묘 약 28,000본 전부를 뽑아 흩뜨리고 면사무소 유리창을 깨뜨렸다. 양 봉식·전만표 등은 “상묘를 이렇게 흩뜨려 놓으면 내일 다시 주워 모아서 마을 주민에게 배 부할 것이다”, “상묘를 소각하지 않으면 면민들은 대금을 지불하게 되고 또는 무거운 세금을 부담하게 되니 제일로 소각해 버리자”고 주장하였다. 김용하(金用夏)·전재득(全在得·金在 得) 등도 주도적인 활동하였다. 군중들도 다시 함성을 내며 흩어져 있는 상묘를 면사무소 앞 도로로 가져다 약 27,000본을 소각하였다. 이어 양봉식 등은 주재소로 이동하여 오후 11시 경까지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