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page

81 총 설 제지하자, 군중들은 격분하여 다시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1,000여명 군중들은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지고 막대기 등으로 주재소를 파괴하며 헌병들을 구타하였다. 김수원(金壽遠)·조기 시(曺奇矢) 등이 헌병들에게 압박을 가하고 주재소를 공격하여 육창주·허상기·김용이·허 량 등은 유치장을 탈출하였다. 탈출 인사와 허상구·공재익(孔在翊) 등이 주도하여 계속 헌 병과 보조원들을 공격하고 유리창·벽·판자 울타리(板 摒 ) 등 시설물들을 파손시켰다. 군중 들은 오후 5시 반경에도 헌병을 향해 나무 막대기나 돌을 던지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군 중들이 헌병 승마(乘馬)를 참나무 몽둥이로 후려갈겼을 때, 헌병이 다시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독립운동으로 헌병 10명을 부상시키고, 주재소 현관 정면의 벽·판자 울타 리·정문 보안등 등 시설물이 파괴되었다. 한편 육사원(陸士源)은 3월 27일 이원시장에서 독 립만세를 부르지 않았다. 이를 안 허간(許諫)은 3월 28일 해질 무렵 허훈, 허유(許言由)와 육사 원을 찾아가 “어찌하여 우리와 함께 만세를 부르지 않았는가?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따져 물었다. 육사원의 구차한 변병에 허간은 “너 같은 놈은 때려 죽여야 한다”며 장작으로 그를 구타하여 졸도를 시켜고 37곳에 타박상을 입히는 응징을 하였다. 청산에서는 4월 2일 고한주(高漢周) 등 9명이 오후 9시경 시장에서 약 1,200여명과 대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면소재지를 활보하며 다음날 오전 1시경까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 였다. 군서에서는 4월 8일에 김순구(金舜九)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청주 강내 의 횃불만세운동을 타 지역으로 확산시켰다. 김교윤(金敎潤)이 하동리 주민을 박내현(朴來 賢) 집 부근 우물가에 집합시켰다. 이들은 오후 8~9시경 우물가에 모인 주민 약 50여명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남쪽 서화산 마고촌 안산 위에서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 개하였다. 9) 영동군 양산에서 3월 30일과 4월 3일에 이채연(李彩然)·이헌주(李憲周)·양봉식(梁鳳植) 등 주 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보통학교 학생 이흥연(李興然)·이성주(李聖周)가 3월 29 일에 유곡리(갓골리) 큰 길가에 ‘대한독립만세’를 새겨 목판을 세워 놓은 것이 일경에게 발견 되었다. 일경들은 이들을 학산 서산경찰주재소로 압송하였다. 저녁 때 약 300명이 주재소로 가서 구금 학생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석방되지 않자, 군중들은 투석을 하며 주재소를 공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