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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은 주재소로 가서 “연행자를 석방하라”며 고함을 치고 주재소에 투석 공격을 하였다. 이어 이홍균(李弘均)·김종규(金鍾奎) 등이 끌려가자, 김명진(金明鎭)·안낙여(安落女·落三) 등 은 “어째서 죄 없는 조선인을 너희가 체포하는가? 즉각 석방하라”며 계속 주재소를 공격하였 다. 향전(香田) 등 일경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고 다수가 체포되어 군중들은 점차 해산하 였다. 그러나 장성원·함재원(咸在元)·박순옥(朴順玉·明來) 등 약 200여명은 우체국을 공 격하여 각종 기구·시설을 파괴하고 우편물을 탈취하였다. 장연에서는 4월 1일·2일·4일 김의현(金義玄)·조규학(曺圭鶴) 등 주도로 독립만세운동 을 전개하였다. 김의현·김의대(金義大)·박영래(朴泳來)는 국장 봉도단으로 서울 3·1운동 을 직접 목격하고 귀가하였다. 4월 1일 밤 김의대는 오가리 주민 약 100여명을 이끌고 면사 무소를 공격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는 일제 탄압을 예상하고 다시 면사무소를 공격 하기로 하고, 김의현 집으로 주민 30여명을 불러 4월 2일 밤 면사무소 공격을 주장하였다. 또 김의현의 말을 기록한 “4월 2일 밤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를 예정이다. 만일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그 마을을 파괴하겠다”는 통문을 추점·광진·방곡·조곡리 등 에 회람시켰다. 통문에 따라 4월 2일 밤 면민 300여명이 모였고, 황만모(黃萬模·士仲)는 송 덕리 허금돌(許今乭) 등 4명을 참가시켰다. 면민들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의 건 물과 각종 기구·집기·장부들을 파손시키고, 특히 민적부 9권을 빼고 일체 서류는 모두 찢 어버렸다. 이어 면장 사택도 공격하여 객실 문창을 부수었다. 그리고 조규학(曺圭鶴)·홍윤 식(洪倫植)이 독립운동을 협의하고, 조규학이 4월 2일 집에서 태극기 7기를 만들었다. 이들 은 4월 4일 밤 주민 30여명과 태성리 뒷산 정상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청천에서는 4월 1일 장날 이성태가 청천리 장터에서 약 2~30명에게 “대한독립만세를 불 러 독립운동을 하여야 한다”고 연설을 하고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읍내를 활보하여 군중은 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읍내 보병들이 주도자를 체포하자, 군중들은 수차례 집결 하여 구출을 시도하다가 오후 10시경 해산하였다. 같은 날 소수에서는 유해륜(柳海崙)·경권 중(慶權重)·송능식(宋能植) 등이 면민들과 면장 김승환(金昇煥) 집과 경찰주재소에서 독립 만세를 합의하였다. 이튿날 유해륜·경권중은 오후 4시경 약 200여명과 면장 집과 주재소에 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특히 송능식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중을 이끌었다. 연풍에서는 3월 28일 오후 6시 주진리 박봉석(朴奉石)·조세기(趙世基)가 보통학교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