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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는 4월 4일 밤 중도문리 이종국(李鍾國) 집에서 태극기 2기를 제작하고 주민에게 물류시장 에서 독립만세를 권유하였다. 이튿날 정오경 물류시장에서 그가 태극기를 앞세우고 조선독 립만세를 선창하자, 수백 명 군중도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약 20정 거리의 대포주재소 부 근에서도 만세를 고창하였다. 또 군중들에게 “명 6일은 양양 읍내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또 구속 인사를 석방하도록 요구할 터이니 일동도 와서 참가하라”고 연설하였다. 그리하여 4월 6일 오후 1시 수백 명과 읍내시장에서 태극기를 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12) 양구군 양구에서는 4월 3일 정승원(鄭昇源)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최우명(崔 遇明)·김병하(金炳夏)와 3월 30일 교구실에서 4월 5일 독립운동을 협의하였지만 일제 탄압 과 독립만세 인사 체포를 듣고 4월 2일로 앞당겼다. 이어 그는 최기호(崔寄浩)·박의순(朴義 淳) 등 4명에게, 최영구(崔榮九)는 교도들에게 권유하였다. 폭설로 연기하여 4월 3일 김명옥 (金明玉)·김창헌(金昌憲) 등은 용호·함춘·팔랑·동수·용연·대동리 교도 십수명과 최영 구(崔榮九)가 만든 깃발을 앞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죽곡리를 거쳐 군청 앞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13) 회양군 회양에 독립선언서는 3월 1일 평강교구장 이태윤에게 120매를 받은 김천일(金千鎰)이 밤 새 걸어서 새벽에 상송관리 유한영(柳漢永)에게 1부를 통천이나 고성에, 나머지를 읍내 송환 순(宋煥淳) 집으로 배달을 부탁하여 도착하였다. 하북에서는 4월 14일·16일 양일간 이봉삼(李逢三)·신영규(申永奎) 등 주도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14일 밤 이봉삼·이봉구(李鳳九)·이흥규(李興圭)는 선암리에서 주 민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한편 신영규는 4월 12일 초일리로 찾아 온 송찬용(宋贊用)·송 두용(宋斗用) 형제에게 독립만세를 권고하였다. 이들은 김일호(金日浩) 집에서 신영규의 문 안으로 “오는 15일 회양군 읍내 공자묘 앞으로 집합하여 만세를 부르도록 이민(里民)은 이 민을 선동하되 만일 여기 응치 않으면 집에 방화한다”는 ‘조선독립만세’ 통고문 20여통을 봉 투에 넣어 이민 각위(各位)라 쓰고 임수성(林秀成)에게 배부를 부탁하였다. 임수성은 4월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