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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기(金命基)에게 권유했으나 불참을 표시하여 다투었다. 김명기가 김병하에게 “네놈은 강도 라”고 하자, 김병하는 막대기로 김명기의 코·입술 등 얼굴에 부상을 입혔다. 오전 3시경 약 100명이 모여 지하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판교에서는 4월 7일·8일 양일간 이만권(李萬權)이 독립만세 권유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는 4월 7일 명덕리 고재룡(高在龍) 집에서 조건봉(趙健鳳) 등에게 “동일 문암리시장에서 만 세를 부르기로 되어 있으므로 독립운동에 참가하라”고 권유하였다. 이튿날에도 용천리 김태 림(金泰琳) 집에서 부자에게 “당촌(當村)에서도 만세를 외치기로 되어 있으므로 일동 참집하 도록 마을 주민들에게 전해 달라”며 부탁하였으나 김태림이 싫어하는 말을 하므로 “너는 조 선인이면서 어째서 그러한 말을 하느냐?”고 책망하였다. 또 김수명(金受明)에게 주민 규합 을, 김병수(金秉洙)에게는 가르치는 학생들을 전부 문암리시장에 모이도록 부탁하였다. 또 4 월 10일에는 이병준(李炳準)·한인백(韓寅伯)의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이 있었다. 이병준 이 한인백에게 천도교도의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부탁하였다. 이에 한인백은 관현리 강도윤 (姜道允)·마운래(馬雲來)·한인보(韓寅輔)·박규응(朴奎應) 등을 방문하였다. 이후 그는 5 월 경 강도윤·한인보·마운래에게 성미(聖米)의 반기분 명목으로 5원씩, 또 구인된 천도교 도 차입 비용으로 한인보·마운래에게 2원씩을 받는 등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 안협에서는 4월 10일·23일 박용의(朴容義)·장강환(張康煥)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 하였다. 4월 9일 오후 9시경 박용의·장강환이 독립만세를 결의하고 김응순(金應順)과 동장 송원흥(宋元興)을 찾아가 “명 10일 이천군 안협리 읍내로 가서 독립만세를 부르려고 한다. 너는 동장 입장으로서…모두 참가하도록 주민들에게 통지하여 달라”, 만약에 응하지 않는 자는 “집에는 방화, 또는 타살하거나 동네로부터 축출한다” 혹은 “만세를 부른 뒤에 짐승 이 상의 취급을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였다. 이에 송원흥이 오후 10시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마을을 다니며 설득하여 약 7~80명이 집합하였다. 박용의·장강환 등은 헌병 의 동정이 통지될 때까지 기다렸는데 “헌병이 만세를 부르는 자는 타살한다”고 말을 타고 온 다는 통지가 전해져 주민들이 피신하였다. 그러나 박용의·장강환은 거성리시장에서 2~30 명과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4월 23일에도 권유에 주민들이 참가하지 않자, 이들은 사견동 헌병주재소에서 박용의가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