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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榮)을 장전리 집으로 불러 선언서와 같은 문서를 인쇄 반포하여 선언서 취지를 관철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이들은 3월 22일 면사무소 부근에서 선언서 전반부를 반지 91매로 만들고, 3월 31일 박성준(朴成俊)과 태극기 250기를 제작하였다. 4월 1일 최상린 등이 예수교도 십수 명 집을 방문하여 참가를 권유하였다. 4월 2일 최상린 등 5명이 유시국(劉時國) 등 예수교도 약 20명과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마을 앞 다리까지 행진하였다. 이튿날에는 최상린 등 4명이 유시국 등 약 백 수십명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까지 행진하였다. 일경들은 독립선언서 90매, 태극기 107기를 압수하였다. 10) 이천군 이천에서는 독립선언서 배부와 독립만세 권유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우선 독립선언 서 배부로 3월 2일 이광선(李光善)이 이춘호(李春浩)와 독립운동을 협의하고 안상덕에게 받 은 15매를 탑리 교구실에서 김순필(金舜弼) 등 교도에게 설명하고 배포를 부탁하고, 김순필 은 2매를 이천면내에 배포하였다. 이춘호도 3월 3일 장선경(張善慶)에게 15매를 받아 교구 실에서 십수 명을 “우리 조선 독립을 우리 천도교 60년래의 소망이었었는데…독립을 부르짖 어 일치 협력해서 그 목적 관철에 노력하자”고 설득하고 김형구(金瀅九)·이경선(李京善)에 게 15매를 군내 각처에 배포하게 하였다. 권유 활동으로 이춘호가 독립선언서 배부 때 장두 경(張斗京)·김병률(金炳律)을 설득하였다. 이어 장두경은 판교 군지리 이흥선(李興善) 집에 서, 김병률은 박필주(朴弼周)에게 독립선언과 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은 “천도교 60년래의 염 원이었던 조선 독립의 목적을 달성시킬 시기가 도래한 만큼 크게 분투 노력하자”고 참여를 독려하였다. 김병주(金炳柱)는 3월 3일 서울에서 박인호에게 독립선언을 듣고 찬성하여 3월 10일 교구실에서 헌병 보조원 김유기(金有基)·김인관(金仁寬)에게 “헌병 보조원의 직을 사 면하고 이 운동에 참가한다면 독립이 되는 날에는 반드시 높은 직위에 앉게 될 것은 의심 없 으므로 여기에 참가 협력하라”고 회유하였다. 이어 이튿날에도 김인선(金仁善)에게 “독립운 동은 멀지 않아서 성공할 것인데…우리 천도교도와 함께 이 운동에 참가 협력하여 독립만세 를 외치자”, “당일은 이 운동의 자금이 부족하므로 이를 제공하라”고 하였다. 4월 초에는 더 욱 활발해져 이광선이 4월 5일 추목리 박천언(朴千彦) 집에서 박천언 외 수명에게, 박필주가 4월 7일 교구실에서 변성주(卞聖周)와 4월 15일 남대리 집에서 박필곤(朴弼坤) 외 수명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