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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이 앞서 집에 와 있던 헌병 군조에게 의사를 타진하자, 헌병 군조는 “좌우간 나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밖으로 나왔다. 박의병이 나오자, 곽진근·박창근·윤상식 등은 만세를 부 르게 하고 욕을 하며 옆구리를 찌르는 등 폭행을 가하고 마을 다리까지 끌고 갔다. 이때 곽진 근은 부인들 사이가 좋으므로 “이 집에 이완용(李完用)을 숨겨두고 있음이 틀림없으므로 그 를 문밖으로 내놓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고 박의병을 압박하였다. 이어 3월 11일에는 곽진 근·이배근·송의선 등 약 700명이 철원역 부근에서 윤상식이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 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특히 기차가 도착 때마다 기차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17일에는 최치달이 읍내 장날 이병준(李炳準)을 만나 “오늘 장날을 이용해서 만세를 부르려 고 한다” 말하고 군중 앞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이병준도 군중과 독립만세를 연 호하였다. 갈마에서는 3월 11일 신성규(申聖奎)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는 3월 11일 문혜리 김칠룡(金七龍) 집에서 한 인사로부터 “철원 읍내에서는 독립만세를 부르는데 어째 서 이 마을에서는 부르지 않느냐?”고 권유를 받고 만세를 부르기로 상의하였다. 이들은 주민 을 면내 각 마을에 보내 ‘1집에서 1인씩 면사무소 앞으로 모여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권유하 고, 신성규도 배성백(裵聖伯)에게 권유하였다. 오후 11시경 800여명이 면사무소에서 한국독 립만세를 고창하고 헌병주재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열창하였다. 임낙호(任洛鎬)·윤호병(尹 浩炳)가 군중들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열창하였고, 주도 인사 4명은 현장에서 헌병에게 체 포를 당하였다. 내문에서는 이주봉(李周鵬)·박용득(朴龍得)·최재청(崔在靑) 등 5명은 4월 7일 저녁 때 독검리 주민에게 독립만세를 설득하고, 동장 윤선삼(尹先三)도 강기준(姜祺俊)에게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방화한다”는 통지를 보냈다. 이에 이튿날 윤태병(尹泰炳)·강기준(姜祺俊) 등 이 다수 주민과 태극기를 앞세우고 면사무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2) 김화군 김화에 독립선언서는 채장숙(蔡章淑)·안상덕(安相德)에 의해 전달되었다. 안상덕 등 5명 이 3월 2일 아침 암정리 천도교구실 신동민(申東敏) 집에 와서 채장숙은 “조선이 지금 독립 국으로 되므로 그 선언서를 가지고 왔다”, 안상덕은 “우리 천도교도만으로는 이 일을 성취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