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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리 심승훈(沈承薰)에게 “군중을 모아 독립만세를 외칠 터이므로 이에 참가하라”, 4월 3일에 는 창리에서 보통학교 학생 한백웅(韓伯熊)·한돈우(韓敦愚)에게 “제군은 학생을 선동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힘쓰라!” 격려를 하였다. 대신에서는 4월 3일 황재옥(黃在玉)이 개군·대신면 소식을 듣고 윤촌리 주민 4~50명과 밭에 불을 놓고 만세를 선창하여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북내에서도 같은 날 신륵사 승려 김용식(金用植·仁瓚)이 권중순(權重純) 등에게 만세를 권유하고, 천송리에서 수십 명이 만세를 외치며 읍내로 행진하였다. 이어 200여명을 이끌고 한강 맞은편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여 군중들도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 다. 또 이원기(李元基)·이원문(李元文) 등은 경성인들이 여주인을 개·돼지로 취급하는 것 에 분개하고 독립운동을 하여 여주인의 면목을 세우고자 하였다. 4월 1일 조경호(趙經鎬)가 군중 모집을 위한 경고문 발행을 제의하자, 이원기가 독립선언서를 기초로 “4월 5일 읍내 장 날을 기하여 독립운동을 행할 터이므로 그 곳의 다락문 앞으로 집합하라”는 경고문을 만들 었다. 조경호·이원문은 42매를 작성하여 원필희(元弼喜)·심상의(沈相儀) 등이 배포하기로 하였다. 4월 2일에는 강영조 등이 일장기를 개조하여 태극기를 만들고, 4월 3일에는 김학수 (金學洙)가 이원기·원필희와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한편 현암리 주민 5~60명이 오금리로 와서 최영무(崔永武) 등에게 “어제 북내면장 조석영(曺錫永)이 인치되었다”고 전하여 석방을 위해 현암·오금리 주민들이 면사무소에 모였다. 그때 “면장의 귀환이 허락되었다”고 귀가 자도 있었으나, 일부 인사들은 남아 음주를 하였다. 최석기(崔石基) 등이 독립만세를 제의하 여 장암·외룡·덕산리 등을 돌아 공북학교에 주민들이 모일 때까지 설득하였다. 독립운동 을 준비하던 이원기·원필기(元弼基) 등도 최영무의 권유로 동참하였다. 당우리 공북학교에 약 800명이 모이자, 면장 조석영은 해산을 요구했지만 최영무는 만세를 주장하였다. 군중들 은 최영무가 태극기를 흔들며 선두에서 인솔하고, 이원기·김학수·원필희·강두영 등 십수 명이 ‘한사람도 도피하여 숨지 않도록 감시’하며 읍내를 향하여 만세 행진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