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page

55 총 설 19) 이천군 신둔에서는 3월 31일 김영익(金永益)이 “내일 아침 식사 후 조선독립시위운동을 거사하기 위하여 집합하라”는 통문 2통을 회람하고, 4월 1일 수하리 주민 약 500여명이 면사무소에서 서기창(徐基彰) 선창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모가에서는 4월 2일 권중효(權重孝) 등이 서동리 남상찬(南相贊) 등 수명에게 “조선민족독 립을 위하여 만세를 부르지 않으니 후환의 염려가 있다”고 말하고 150명과 응봉산에서 조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20) 진위군 병남에서는 3월 10일 밤 이도상(李道相)이 동생 이덕상(李德相)에게 “명일이 평택 장날이 므로 그 곳에 가서 동지와 함께 조선독립을 제창하여 만세를 외칠 작정이다. 그렇게 하면 곧 체포될 것이므로 다시 집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여 달라”고 하였다. 그는 이튿날 오후 5시경 평택 역전에서 만세를 선창하고 군중들에게 만세를 호소하였다. 이 에 군중과 학생들이 모자를 벗어 흔들며 큰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북면에서는 3월 31일 박성백(朴成伯) 등이 오후 4~6시경 봉남리 주민 약 400명과 태극기 30기를 흔들며 면사무소·주재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면내를 순회하였다. 4월 1일 에는 정경순(鄭庚淳) 등이 저녁 식사 후 짚신을 삼다가 정경순의 제안으로 은산리 산에서 독 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약 30명이 올라와 함께 만세를 부르자, 마을에서도 독립만세를 연호 하였다. 또한 최선유(崔善有)도 주민들과 주재소에서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청북에서는 4월 1일 밤 안육만(安六萬)·김원근(金元根)이 백봉리에서 “이 동리에서는 왜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는가? 빨리 나와서 부르라!”고 설득하여 최만화(崔晩華) 등 수십 명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오성에서는 김용성(金容成) 등이 4월 3일 밤 학현리 봉오산에서 짚불을 놓고 주민 12~3명 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21) 여주군 주내에서는 조병하(趙炳夏)가 독립만세 권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3월 26·7일경 홍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