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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총 설 미상자에게 「독립신문」 1매를 교부하였다. 3월 25일에는 이시종(李時鍾)이 저녁 때 이윤종 (李胤鍾)에게 “조선은 독립해야만 한다”는 12개 항목이 기재된 「조선독립신문」을 빌려 읽었 다. 그는 다음날 오후 3시부터 6시경까지 천중선(千重善·仲善) 등 송파리 주민 300여명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 7시경 대왕 수서리로 가서 주민 약 2~30명 선두에서 만세 를 외치며 마을을 순회하였다. 또한 100여명을 이끌고 대왕면사무소에서 약 20분간 독립만 세를 외치고 남포 등불을 켜서 “조선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독립신문」 일부를 읽고 “조선이 독립하면 부역·세금 등이 필요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서부에서는 3월 27일 구희서(具羲書)가 감일리 주민 약 40명과 면사무소에서 조선독립만 세를 고창하고, 상일리 헌병주재소 앞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쳤다. 돌마에서는 3월 28일 한백봉(韓白鳳)이 율리 주민 약 50명과 인근 주민들이 합세한 수백 명과 오후 8시경부터 이튿날 저녁때까지 면내를 순회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오포에서는 3월 28일 고산·문형·양벌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정제신(鄭 濟莘)은 오전 1시경 고산리에서 약 40명과 뒷산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고, 11시경 약 1,000명과 면사무소·군청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인택(金仁澤)·임무경(林武京) 은 오전 1시 문형리에서 약 30명과 부근 산위에서 횃불을 올리고 약 30분간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고, 오후 2시 군청 앞에서 약 1,000명과 독립만세를 부르고 경안리 일대를 순회하였 다. 유면영(柳冕永)은 오전 9시경 양벌리에서 약 600명에게 “금후 조선이 독립하면 이런 경 사는 또 없을 것이니, 일동은 만세를 부르라”, “이번에 독립을 할 터이니, 이 만큼 기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연설을 하였다. 이어 “군청에 가면 만일 헌병과 보조원이 군중에게 발포하더 라도 반드시 일심동체가 되어 그런 자는 체포하자”며 군청에 가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실촌에서는 4월 6일 이선리 구장 오수식(吳壽軾)이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경까지 약 50여 명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만선리 주민 약 200여명도 합세하였다. 15) 장단군 장도에서는 3월 25일부터 30일까지 각 마을 산에서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수봉(李壽奉) 등이 3월 25일부터 3일 동안 반룡산에서, 이택신(李澤新)이 3월 28·29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