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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창 63장과 기타 기물 십수 점을 파괴하고 또 부근 일본인 상점과 주택에도 돌이나 몽둥이로 공격하여 유리창·판자문 등을 파손시켰다. 반월에서는 3월 31일 유익수(柳益秀)가 시장에서 면서기를 만나 어제 시흥 수암리 독립만 세를 이야기하자, 면서기는 군중 지휘를 부탁하였다. 그는 5~600명에게 폭행·협박을 말도 록 주의하고 군중과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13) 파주군 와석에서는 3월 10일에 임명애(林明愛)가 교하보통학교 운동장에서 학생 100여명에게 조 선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25일에는 김수덕(金守德) 등이 염규호(廉圭浩) 원고로 “오는 28일 이민 일동은 윤환산으로 집합하라”는 유인물 60매를 만들고, 김창실이 구당·당하리에 배부 하였다. 광탄에서는 3월 27일 조무쇠(曺茂釗) 등이 발랑리 주민 수백명과 면사무소에서 만세를 외치 고, 이튿날에는 면민 1,000여명과 면사무소에서 봉일천 시장까지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14) 광주군 동부에서는 3월 20일·26일 마을 구장들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0일 에 망월리 구장 김교영(金敎永)이 타인의 권유를 받아 주민 9명과 면사무소 앞에서 오후 1시 경부터 4시경까지 3시간 동안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26일에는 김홍렬(金弘烈)이 오후 10시경 풍산리 주민 약 20명과 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다음날 오전 3시경까지 조선독립 만세를 연호하였다. 교산리 구장 이대헌(李大憲)은 면사무소 길가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주 민에게 “만세를 부르러 모이라”고 전달하였다. 다음날 오전 2시경 십수 명과 태극기를 흔들 며 앞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약 1시간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오전 3시경 하산하여 3시 30분 경 면사무소에서 약 30분 가량 만세를 연호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그리고 11시경 30여명과 다시 면사무소에 가서 오후 2시경까지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즉 그는 12시간 동안 교 산리 일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중대에서는 3월 21일 장덕균(張德均)·김준현(金俊賢)이 선언서 20매와 「조선독립신문」 30매를 인쇄하였다. 장덕균은 3월 25일 정석호(鄭錫浩)에게 유인물 2매, 건너편 한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