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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동에 모이라”는 격문이 돌았다고 듣고, 그날 밤에는 동생에게 능곡리 부친 집에도 통문이 왔 다고 들었다. 홍순칠(洪淳七)은 3월 30일 임학신(林學信)에게 통지를 받고 국유지 소작인들 에게 격문을 알리고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지가 되니, 이때 만세를 부르 는 것이 득책이다”고 권고하였다. 유익수(柳益秀)·윤동욱(尹東旭)·김병권(金秉權) 등은 성 포·능곡·화정리 주민들과 격문 권유로 비림동으로 갔다. 성포리 구장이 군중 지휘를 유익 수에게 부탁하였다. 유익수는 도살장에서 홍순칠이 만든 기를 받았고, 홍순칠은 인원을 조 사하고 만세를 부르는 이유와 읍내로 가자고 연설하였다. 그때 순사가 해산을 명령하며 “읍 내로 갈 경우 발포하겠다”고 협박하여 해산 여부로 의견 대립이 있었다. 결국 유익수가 선두 에서 읍내쪽으로 향하여 모두 뒤를 따랐다. 윤동욱이 선두에서 이끌고, 유익수가 태극기를 흔들며 지휘하여 읍내로 갔다. 윤병소는 와리에서 읍내로 가고, 홍순칠은 허치선(許致善) 집 에 모인 30명을 이끌고 수암 남쪽 밭에 이르렀다. 면내 18개 마을 2,000명은 주재소 서쪽 밭 에서 큰 깃발들을 받들고 각자 작은 기를 가지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특히 유익수· 윤병소·윤동욱 등이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일경들이 해산 을 명령하였으나 홍순칠·김병권(金秉權) 등 군중들은 “수암주재소·면사무소를 불태워버리 자!”고 외치며 주재소·면사무소·보통학교·공자묘 앞으로 행진을 하였다. 윤동욱은 보통 학교 앞에서 순사 임건호(任健鎬)에게 “당신도 조선인이니 만세를 부르라” 권유하였다. 일경 들은 해산이 곤란해지자, 발포 위협을 가하여 군중을 해산시켰다. 이봉문(李奉文)은 2~3명 과 음주하다가 수암리 구장의 불참에 오후 10시경 집으로 찾아가 따지기도 하였다. 과천에서는 이복래(李復來)가 “각자 관솔불을 가지고 남태령에 와서 같이 만세를 부르라” 는 격문을 돌리고 태극기 15기를 만들었다. 그는 3월 30일 오후 8시경 남태령에서 50여명에 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관솔불을 든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읍내에서 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보통학교를 순회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군자에서는 4월 4일·5일 양일간 독립만세운동과 유인물 배포가 있었다. 4월 4일 강은식 (姜殷植)이 거모리 면사무소·주재소에서 수백명과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 였다. 김천복(金千福)는 죽율리 주민에게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 위해 거모리 면사무소 부 근에 집합하라”, “만약 불응하는 때는 후환이 있을 것이라”며 약 30명과 거모리로 향하였다. 일경의 발포로 주민은 흩어졌으나 김천복과 2~3명은 거모리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