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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총 설 9) 시흥군 서이에서는 3월 27일 이영래(李永來)가 일동리 백기화(白基和) 집에서 이종교(李鍾敎) 등 에게 “다른 동리에서는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불러…당신들은 짚신만 삼고 있어 되겠는가?” 하며 설유하였다. 이들은 오후 8시경 마을 서쪽 언덕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서면에서는 3월 27일 밤 이정석(李貞石)이 만세를 불러 다음날 노온사 경찰주재소 순사보 최우창(崔禹昌)·금택성웅(金澤成雄)에게 구금되었다. 이종원(李宗遠)은 저녁 때 최호천(崔 浩天)에게 아들 이정석의 탈환을 부탁하였다. 최호천은 “그러면 오늘 밤 이민들을 모아서 주 재소로 몰려가 찾아 줄터이니 안심하라. 당신도 동행하자”며 부친을 안심시켰다. 이순만(李 順萬)의 탈환 계획을 듣고 온 윤의병(尹宜炳)은 20명을 이끌고 소하리 내대촌 주막리로 갔 다. 오후 7시경 최호천과 약 50명이 면사무소 아래에 모이자, 이종운이 아들의 석방을 호소 하였다. 최호천·윤의병은 인원이 부족하니 내가리대리 주민도 규합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이들은 가리대리 어구에서 만세를 외치고, 이정석의 탈환을 소리쳤다. 최호천은 주민에게 일경의 무력 발포가 있으면 대항하라고 알리고, 윤의병과 함께 주민들에게 돌과 막대기를 준 비시켜 11시 주재소에 도착하였다. 주민들이 주재소를 포위하고 “불태워라! 순사와 순사보를 죽이라”고 외쳤지만 순사 적송(赤松)·순사보 최우창·금택 등은 등불을 끄고 없는 듯이 가 장하였다. 이에 군중들은 2개 집단으로 나뉘어 순사보를 찾았으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였 다. 약 200명은 다시 주재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게시판·숙직실 뒷벽·문짝 등을 파 괴하였다. 그러자 적송순사가 나와 용무를 묻자, 최호천이 “우리들은 이정석을 탈환하러 왔 다. 이정석을 내어 달라”고 하였다. 순사는 “명 29일 본서에 들어가니 그때 이정석의 신병 취 하를 출원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최호천·윤의병은 “오늘 저녁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내일 밤 다시 습격하기 위해 몰려 와서 불태워 버리고 죽이는 행동을 하여도 괜찮겠는가?”하 고, 이종원은 “말로 약속하여서는 효과가 없으니 계약서를 쓰라”고 요구하였다. 순사는 “관 리인데 약속을 어기겠는가? 그런 것을 하지 않아도 틀림없으니 속히 해산하라”고 하였다. 최 호천은 “계약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며 군중들과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어 보통학교 뒤에 서도 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수암에서는 3월 30일 격문을 통해 모인 18개 마을 면민들이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 개하였다. 윤병소(尹秉昭)가 이봉구(李鳳求)에게 3월 29일 화정리에 “명 30일 수암리 비립